[신조어사전] 프로추어(proteur) - 프로를 능가하는 뛰어난 아마추어

영국의 첩보 소설가 존 르 카레는 외교관이자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다 자신의 사상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필명으로 담아 발표한 소설이 큰 반향을 일으키자 작가로 전업한 원조 '프로추어' 였다. 사진 = Kirsty Wigglesworth AP/연합뉴스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삼엄했던 냉전 시대, 주독일 영국대사관 2등 서기관 데이비드는 은행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금액이 초과됐습니다” 그는 곧장 대사관에 사표를 던져 외교관직을 버리고 작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로 유명한 첩보 소설의 제왕, 존 르카레의 이야기다. 스위스 베른대를 거쳐 옥스퍼드대 링컨칼리지에서 근대유럽어학을 전공한 그는 외교관으로 활동했지만, 동시에 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의 요원으로 동독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스파이였다. 신분을 감추고 은밀한 일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선과 악, 시대와 인간에 대해 궁구했고, 그 고민의 소산으로 완성한 소설을 필명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출판사 인세가 들어오는 계좌를 개설한 뒤 은행에 “일정 금액을 넘기면 꼭 연락해달라”고 주문했는데, 그가 발표한 세 번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대 히트로 거액의 인세가 입금돼 은행에서 연락이 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교관직을 던지고 평생을 작가로 살았다.

프로추어는 전문가(Professional)와 비전문가(amateur)가 합쳐진 말로 프로에 가까운 아마추어를 지칭한다. 특정 분야의 애호가로 출발해 전문가 수준의 지식과 장비, 노하우를 갖춘 프로추어들은 문학과 예술 분야는 물론, 패션과 IT 업계에서 시장의 평판을 리드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트렌드리더로 각광받고 있다. 영화로 제작돼 널리 알려진 ‘마션’의 작가 앤디 위어는 공학도 출신의 소프트웨어 회사의 프로그래머로, 재미있는 SF소설을 찾아보다가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킬 작품이 좀처럼 나오지 않자 급기야 직접 소설 쓰기에 착수, 2009년 99센트짜리 웹 소설로 출간한 ‘마션’이 뜨거운 반응을 얻자 전업 작가로 변신한 프로추어의 대표적 케이스다. 뛰어난 프로추어의 등장이 나태해진 프로의 의식과 태도를 곧추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