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협력업체-하청업체
IT산업 노동착취의 굴레
평범한 직장인이던 주인공이
노조 국장까지 되는 삶 통해
현실처럼 생생하게 담아
[아시아경제 기하영 기자]"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삼 년 내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생존을 위해 투쟁했다. 먹고살기 위한 투쟁을 벌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노조를 설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구디 얀다르크'가 돼 있었다.(200쪽)"
제5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인 '구디 얀다르크'는 암호 같은 책 제목이 눈길을 끄는 소설이다. '구디'가 IT업계의 중심인 구로디지털단지의 약자임을, '얀다르크'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이안'과 '잔다르크'의 조합임을 알게 되면 이 소설이 말하고자하는 의미가 어렴풋이 그려진다. 사이안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소설 속 묘사된 한국 IT업계의 적나라한 노동현장은 현실처럼 생생하다.
사이안은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IT업계 종사자다. IT와 전혀 상관없는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IT 대기업 서비스기획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스타트업 게임기획자, SI업체 프리랜서를 거쳐 IT 노조 문화국 국장까지 경험했다. 그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IT강국 코리아의 그늘진 이면이 드러난다.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 해야 하고, 대기업-협력업체-하청업체로 이어지는 노동착취의 굴레가 선명해진다.
실제 IT업계에 종사한 작가의 경험은 주인공 사이안의 입을 빌어 IT산업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싼값에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대체할 자원도 널려있기 때문에 IT기업의 인사관리와 인력사무실에서 일용직 노동자를 대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거나 "유능한 SI 업체는 개발력이 우수한 곳이 아니라 영업을 잘하는 곳이다. 실제 개발 능력은 더 작은 업체와 프리랜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좌우한다" 등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제5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심사위원이자 문학평론가인 류보선은 심사평에서 "'구디 얀다르크'는 구로디지털단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말로는 실리콘밸리를 얘기하고 스티브잡스를 얘기하면서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한국문학을 비판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운다"며 "우리 문학사에 너무 늦게 도착한 21세기형 노동소설"이라고 했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얘기하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과 연대'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 책은 되도록 약자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IT종사자가, 여성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며 "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적나라한 IT업계 현실에 대한 도발적인 묘사와 달리 사랑과 연대라는 결론은 다소 김이 빠질 수 있다. 사이안이 얀다르크로 각성하는 이유 역시 그 복잡한 내면을 이해하기엔 묘사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그녀 주변사람들이 보여준 애정과 연대로 사이안이 죽음 대신 삶을 선택했을 때 그녀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IT 노조 문화국장 자리마저 기존 운동권 권력에 빼앗기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생 같지만 그녀의 곁에는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간제교사로 일하면서도 교감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 대신 스스로에 떳떳한 삶을 선택한 친구 여진주, 현실은 2군 유망주지만 1군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믿는 야구선수 남자친구 오영일도 그렇다.
지금 뜨는 뉴스
"이제야 잔다르크가 전쟁에서 연승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가 지었던 승리자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은 자신 있게 전진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지어본 적이 있는가?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에도 다음 전투를 준비하느라, 닥쳐올 위기를 걱정하다가 전쟁에서 패배했고 이렇게 늙어버렸다. (중략)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하지 말자.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가족 같은 건 없지만 다시 만들 수도 있잖아?(238쪽)"
기하영 기자 hykii@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