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웅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내부가 황금빛으로 찬란한 로마 시내의 자그마한 성당입니다. 종교와 예술이, 건물의 세부와 장식 예술품들이, 통짜배기 그대로 작품이 되어버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지요. 작고 아기자기한 화려함의 극치를 음미하려면 여기가 적격입니다. 벽면에 감실을 파고 전시한 조각품들과 그 위의 광창(光窓)을 통해 내려 쪼이는 로마의 오후 햇살이 눈부십니다.
돌에 새겨진 환희. 그 환희를 실감하기 위해 성당에 들어옵니다. ‘성녀 테레사의 환희(Ecstasy of St. Teresa)’. 성당의 왼쪽 제단, 코르나로 예배당 높은 곳에 있습니다. 천사가 테레사 수녀를 향해 화살을 당기고 있는 모습.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환희는 왜 고통과 함께 오는 것인지, 천국과 지옥은 왜 한 몸 안에 찾아드는지, 깊고 큰 수수께끼 앞에 마주섭니다.
테레사 수녀(1515~1582)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열아홉에 수녀가 되지요. 어느 날 천사의 화살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는 환상을 체험합니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온몸을 환희로 채우는 사랑의 불화살 체험. 피부에 문신 새겨지듯 그녀의 심장에 환희의 흔적이 남습니다. 불에 데인 심장! 네 명의 추기경이 살해되는 댄 브라운의 추리소설 ‘천사와 악마’에 이 성당과 조각상이 등장합니다. 과학의 셋째 원소인 불을 상징하는 곳. 세 번째 희생자인 가이드라 추기경이 공중에 매달린 채 화형당하는 곳이지요. 아마도 불에 데인 심장의 이미지가 이 성당을 대표하는 모양입니다.
천사의 불화살이 박힌 테레사의 심장.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베르니니(1598~1680)는 이 체험을 토대로 신이 인간에 임재하는 순간을 포착하지요. 그것이 환희 또는 법열(法悅)로 번역하는 엑스터시입니다. 천사는 수녀를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고, 수녀는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의 고통과 환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표정이 관능적입니다. 테레사의 성스러운 체험을 예술가가 에로틱하게 해석했다는 논란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황홀경으로 녹아내리는 테레사는 만인의 구설을 견디며 4백 년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베르니니는 종교의 힘을 하느님의 말씀에 국한시키려는 태도를 인정하지 않지요. 이 예술가는 온몸의 감각으로 경험하는 하느님을 구현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체험하는 신성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조각 안에 아찔한 엑스터시를 불어넣습니다. 고통을 동반하는 황홀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동서고금에 어찌 테레사에게만 황홀 체험이 있겠습니까. 저는 고려 말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속 수로부인이 바다의 용에게 붙잡혀 간 상황도 접신(接神) 상태의 황홀경으로 봅니다. 신물(神物)과 하나 되는 신비체험인 것이지요. 정체 모를 노인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기 전까지 수로부인의 엑스터시는 계속됩니다. 엑스터시가 끝나자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칠보로 장식한 아름다운 용궁을 보았으며, 그녀의 옷에서는 인간 세상에 없는 기이한 향내가 났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는 이런 엑스터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미술이 발달하지 않은 탓입니다. 미술이 역사를 실감 있게 전하는 ‘역사의 보완재’란 걸 절감합니다.
개인의 신비체험은 아름다운 양식으로 재현되지 않으면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테레사의 특별한 체험을 구전으로 전해서는 효과가 없습니다.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건의 가장 극적인 순간. 내면에서 분출하는 아름다움을 영원히 붙잡아두려는 천재의 재능이 사람들을 작품 앞으로 불러들이지요. 조각은 영원을 순간적으로 정지시켜 눈앞에 보여주는 마법입니다. 베르니니는 돌을 어루만져 그런 순간을 표현하려는 것이지요. 불타는 고통과 아찔한 환희가 함께하는 순간 말입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결혼식 리허설이 한창입니다. 내일 혼배미사를 올린다고 하네요. 신랑과 신부, 들러리 친구들이 모여 있습니다. 평상복 차림이지만 지금 저들은 인생의 빛나는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즐거운 노래. 행복한 웃음. 갓 피어난 유월의 장미처럼, 쾌락은 살아 있어야 진짜라는 걸 느낍니다. 위대한 명작 조각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훨씬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삶은 한 순간도 멈출 수 없습니다. 새가 지저귀고 물이 흐르듯 움직여야 삶입니다. ‘성녀 테레사의 환희’를 보러 들어간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돌의 환희 앞에서 뒤돌아서니 사람의 환희가 다가옵니다. 팔짱을 끼고 가볍게 걸어가는 선남선녀. 쾌활한 웃음소리가 정지화면을 찢으며 이리 넘어오고 있습니다. 돌의 환희와 달리, 사람의 환희는 시간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길 위를 걸어가는 여행자 아니겠는지요. 제 뒤에는 천사의 사랑을 받는 돌조각 인간. 앞에는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 멈춤의 환희와 지속의 환희 사이에서 저는 오랜만에 환해지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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