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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윤의 책섶] 나의 데미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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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가였지만 좋은 아들 못됐던 헤르만 헤세
헤세를 매개로 고백하는 ‘청춘 일탈’의 기록

[김희윤의 책섶] 나의 데미안을 찾아서 '데미안' 출간 100주년을 맞아 시민운동가·시인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헤세와 데미안을 매개로 털어놓은 자신의 청춘시절 일탈의 편린을 한 데 모은 이 책은 저마다의 헤세 읽는 법, 품는 법, 그리고 함께 걷는 법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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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오늘 아침 헤르만 헤세의 편지를 받고 즐겁게 놀랐다. 그 속에는 석 장의 그림엽서와 헤세의 부탁이 들어있었다. 미륵 선생님과 나의 조국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그가 이런 식으로 한국에 관심을 보이다니, 정말, 정말 그의 친절에 감사를 드린다.”


1차 세계대전 참전 후 반전주의자로 돌아선 헤르만 헤세, 나는 이따금 헤세가 뛰어난 작가 이미륵과 자신의 열렬한 팬 전혜린의 나라를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상상했었다. 그리곤 같은 민족이 각각의 이념 논리로 총부리를 겨누다 끝내 분단되고 만 한반도에 꼭 그를 데려다 놓고 싶었다. 앞서 언급한 글은 헤세로부터 크리스마스 답신을 받고 기뻐하던 작가 전혜린의 메모를 패러디한 것인데, 그가 한국에 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면 전혜린은 그길로 남편에게 양해를 구한 뒤 한국의 부친께 전화를 넣고 만반의 한국유람 준비를 마치고는 헤세를 수행했을 것이다. 아직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서울 도심 곳곳의 판자촌과 청계천 다리 아래 거지들, 피란 수도 부산을 거쳐 고도 경주도 한 번 둘러볼 테고. 우연히 자료에서 발견한 1960년 작가 펄벅의 한국 방문 여정에 헤세를 덧씌워보니 웃음이 비져나왔다. 고적이나 왕릉은 됐으니 당장 철책선으로 가자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장관이며 수행하던 전혜린조차 쩔쩔맸을 헤세의 괴이쩍은 모습을 멋대로 그리다 보니 이내 ‘데미안’에 대한 유년의 기억이 삶에 이처럼 스밀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됐다.


과거 다니는 학교마다 1~2년 내로 작파하며 네 번째 캠퍼스에 학비를 뿌리던 한 후배는 이게 다 알을 깨고 나오는 투쟁이라며 자신의 자발 없음을 데미안을 빌려 변호했었다. 신이 아닌 번듯한 대기업에 안착한 그는 아브락사스가 무엇이었는지 조차 이젠 가물가물 하다며 부장님 험담을 조곤조곤 늘어놓는다. 하긴, 헤세와 데미안을 가슴에 품은 작금의 무수한 청년들은 이내 자신이 알을 깨는 게 지쳐 데미안 대신 어미닭을 찾아 줄탁동시를 꿈꾸고, 싱클레어에게 자신을 이입하기엔 그가 가진 금수저 환경에 공연한 질시가 피어오름을 느낀다. 세상 도처엔 데미안이 아닌 내 약점을 잡아 뒤흔들 다수의 크로머가 즐비하고, 베아트리체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은 관조의 대상이 아닌 몰래 찍고, 강제로라도 가져야 하는 탐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데미안을 동경했던 과거의 청년들은 부모가 된 뒤에도 제 자식이 데미안 같은 삶을 살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반응할까? 사실 데미안은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니 ‘아들 데미안’에 대한 고민은 오롯이 여성에게만 국한된다. 아들이 데미안이면 어머니는 에바 부인이 되어야하는데 자식보다 제 삶이 더 버거울 판. 하여 데미안을 창조해낸 헤세의 유년에서 그 원형을 찾아보기로 했다. 학교를 수차례 때려치우고 정신병원에 보내진 ‘아들 헤세’의 방종함은 한 장의 편지에 그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존경하옵는 당신께. 당신께서는 유별나게 기꺼이 희생하는 태도를 보이시니, 제가 당신께 7M이나 권총을 부탁해도 되겠지요. 당신께서는 저를 절망에 빠뜨린 이후로 하루빨리 그 절망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준비가 되어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6월에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이지요. ‘아버지’는 이상한 단어이며, 저는 그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범죄를 저지른다 해도 당신이 제게서 삶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으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책임입니다. 사랑스런 헤르만이 전혀 딴 사람, ‘부모가 살아있는 고아’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 1892년 9월 14일 슈체친 요양소에서 헤르만 헤세가 부친에게 쓴 편지


우수한 신학생 시절 헤세는 부모님께 새로운 환경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편지에 실어 전했다. 하지만 그 편지에 담긴 생활은 대부분 거짓이고, 그는 쉴 새 없이 감정 기복에 시달리다 학교를 탈출한 뒤 퇴학당한다. 그는 부모에게 줄곧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짝사랑에 실패한 뒤 감행한 자살 시도가 미수에 그치자 부모는 그를 정신 병원에 보내기에 이른다. 위 편지는 이때 쓴 것으로 죽어야 할 자신을 왜 살렸는지, 지금이라도 죽을테니 권총을 보내달라는 울골질로 가득 차있다.


훌륭한 작가였을지언정 헤세는 좋은 자식이 되진 못했다. 그가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로 명성을 얻기 2년 전 어머니는 사망했고, 9살 연상 여인과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그는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담은 책 ‘로스할데’ 출판 전 부친에게 쓴 편지에서 “제가 책에서 다룬 불행한 결혼 생활은 잘못된 선택의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의 결혼이라는 문제를 보다 심도 있게 다루면서 예술가나 사상가, 즉 본능에 의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려는 사람에게 과연 결혼 생활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뤄보려 한 것입니다”라는 담담한 변명으로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쉼 없는 방황과 사방에서 불어 닥친 불행은 그를 곤고하게 했으나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의 성장 세계를 보다 풍성하게 하는 질료로 승화됐다.

[김희윤의 책섶] 나의 데미안을 찾아서

살면서 헤세의 데미안을 만나는 것도 축복이나, 나의 데미안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더없는 축복이다. 시민운동가 고상만은 1989년 대학 새내기 시절 만났던 한 사내를 기꺼이 자신의 ‘데미안’으로 소개한다. 부패한 사학재단에 맞서기 위해 운동 조직을 벗어나 합법적인 총학생회장에 출마했던 사내는 당선 후 뜻을 펼치기도 전에 재단이 고용한 조직폭력배의 협박과 폭력에 시달리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이를 계기로 인권운동에 투신했음을 고백하는 고상만의 글엔 눈물이 맺혀있다.


인문학자 김경집은 한 고교 특강 후 자신을 찾아와 별안간 따돌림 때문에 죽고 싶다는 학생에게 우연히 가방에 갖고 있던 데미안을 건네며 따돌림을 스스로 선택한 고독의 기회라 설명했던 그의 구출(?)기를 소개하고, 시인 김형수는 생애의 옆구리나 갈비뼈, 염통이나 허파, 손톱, 발톱 같은 것이 아닌 영혼의 파문을 데미안이 자신에게 남겼노라 고백한다.


헤세는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언제든지 학교 선생에게 미움받는 아이, 종종 벌 받는 아이, 도망치는 아이, 쫓겨나는 아이가 나중에는 우리 국민의 소중한 보물이 된다”고 강변했다. ‘내 삶에 스며든 헤세’는 사회 저명인사들이 헤세를 매개로 고백하는 과거 청춘시절 일탈과 방종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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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스며든 헤세/강은교 외/전찬일 기획/라운더바우트/2만5000원>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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