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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신성과 모독: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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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신성과 모독: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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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카라바조는 매우 인기 있는 화가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카라바조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1610년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추종자가 많았으나 17세기 말에 이르면 카라바조 류의 강렬한 명암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그의 그림들은 뒷방에 처박혔으며 언급하는 사람도 사라졌다. 어쩌다 그를 떠올리더라도 악평 일색이었다.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은 카라바조가 '죄악의 공포와 추악함, 더러움에' 매달려 먹고 살았다고 깎아내렸고, 이탈리아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산루이지 데이프란체시 성당에서 ‘상스럽고 억센 농부들’만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보다는 도메니키노의 프레스코 화를 보라고 추천했다.


1951년 밀라노에서 카라바조 전이 열렸을 때 관람객은 물론 미술사가들도 이 화가를 거의 몰랐다. 놀랍게도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카라바조는 삼백 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카라바조로 불리는 미켈란젤로 메리시는 1571년 밀라노 동쪽의 작은 마을 카라바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1세의 건축 장식 장인이었으나 1576년 이 지역을 덮친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섯 아이들과 남겨진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카라바조는 열세 살 때 화가의 공방에 도제로 들어가 열여덟 살에 수련을 마쳤다. 야심만만한 청년은 밀라노에서 그저 그런 화가로 안전하게 사느니 예술의 중심인 로마로 가서 운과 재능을 시험해보기로 결심했다. 추천장도 없이 무턱대고 로마에 당도한 카라바조는 싸구려 모사화 따위를 그리면서 밑바닥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카드 사기꾼'이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눈에 띄어 후원을 받게 되었다. 로마의 유력 가문들은 저마다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귀족 서열이 복잡한 로마에서 행세하려면 문화적 취향을 갖추어야 했고 예술가에 대한 지원은 필수였다. 카라바조는 추기경의 저택에 작업실을 제공받았고 다른 권력자들도 소개받았다. 처음에는 자유분방한 예술애호가인 델 몬테 추기경을 위해 개인적인 그림들을 그렸으나 차차 교회를 장식하는 대형 종교화로 옮겨갔다.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신성과 모독: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 카라바조 '숫양과 함께 있는 어린 세례자 요한, 1602년(129 x 95 cm, 카피톨리노 미술관, 이탈리아 로마)

카라바조가 로마에 당도했을 때 로마는 화려함과 쇠락이 교차하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세계는 두 쪽이 났다. 빈번한 전쟁으로 교황령의 재정은 부실해졌고 더러운 도시에는 빈민들이 득시글거렸다. 한편 로마는 여전히 신앙의 중심지였다. 1600년이 코앞에 다가오자 유럽 각지에서 순례자 행렬이 이어졌다. 가톨릭 신앙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 위엄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던 교황령의 유력 인사들에게 카라바조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는 두 세기 가까이 되풀이되어 상투적이 되어버린 종교화를 색다른 방식으로 해석했다. 자신이 알고 지내던 건달들을 모델로 써서 그린 카라바조의 그림은 사실적이면서 극적인 호소력을 뿜어냈다. 산루이지 데이프란체시 성당에 '성 마태오의 순교'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성 마태오'를 그린 후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성직자의 의무였으나 호화 저택에서 사치에 젖어 있던 추기경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라바조는 그것을 그림으로 해냈다. 거룩함과 저자거리의 천박함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카라바조의 사실주의는 찬탄과 비난을 함께 불러일으켰다.


1601년 봄 카라바조는 치리아코 마테이의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마테이 가 역시 로마의 세도 가문 중 하나였다. 치리아코의 형은 추기경이었고, 이들 형제의 모친은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숨겨놓은 딸이었다. 마테이 저택 3층 작업실에서 카라바조는 왕성하게 일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시기에 치리아코를 위해 그린 것이다. 치리아코는 조반니 바티스타 즉 세례자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맏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이 그림을 주문했다. 카라바조는 선물 받을 대상의 나이를 고려해 세례자 요한을 풋풋한 소년으로 설정했다.


세례자 요한은 종교화에서 예수,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15세기 종교화에서는 낙타 가죽 옷을 입고, 십자가 모양을 한 가느다란 막대를 든 중년 남자로 묘사되었다. 단독으로는 그려지지 않았고 성모자와 함께 또는 제단화의 한쪽 날개에 그려졌다. 16세기에 접어들자 세례자 요한은 청년 심지어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필리포 리피, 보티첼리, 라파엘로는 세례자 요한을 아기 예수와 장난치는 귀여운 어린아이로 만들었다. 세례자 요한을 단독으로 묘사한 작품도 등장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신비한 미소를 띤 청년의 모습으로 세례자 요한을 그렸다.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신성과 모독: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례자 요한', 1513년~1516년(69 x 57 cm, 루브르 미술관, 프랑스 파리)

카라바조는 이번에도 파격을 택했다. 요한을 전신 누드로 묘사하고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이그누디에서 따온 자세를 부여했다. 이그누디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넣은 누드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미켈란젤로는 창세기의 일화를 다룬 장면들 사이사이에 이그누디를 그려 넣어 장식과 통일성을 꾀했다. 기둥 굽도리에 다양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이그누디들은 창세기 장면들이 보여주는 원죄와 구원의 세계보다는 그리스적인 육체미를 찬미하는 것 같다. 카라바조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요한을 로마 길거리에서 마주칠 법한 개구쟁이로 묘사한 것이다. 조각상을 이차원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은 것 같은 미켈란젤로의 이그누디와 비교하면 훨씬 구체적이다. 벌거벗은 소년은 숫양의 목에 팔을 두르고 관객 쪽을 쳐다보며 씩 웃음을 날린다. 낙타 가죽 옷도, 십자가가 달린 가느다란 막대도 없다. 낙타 가죽은 깔고 앉은 붉은 천 사이로 살짝 보일 뿐이고, 숫양도 일반적인 상징체계에서 벗어나 있다. 요한이 데리고 있는 양은 숫양이 아니라 새끼 양이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속죄일에 제물로 삼는 새끼 양은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예수의 상징이 되어 왔다. 새끼 양은 죄 없는 희생자인 반면 숫양은 야단법석을 동반하는 이교적 제례, 또는 색욕과 연관되는 동물이다. 이처럼 종교화의 도상과 일치하지 않는 특징들 때문에 한때 이 그림의 주인공은 요한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전원시에 등장하는 목동인 코리동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1624년 치리아코의 아들 조반니 바티스타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 그림은 델 몬테 추기경한테 넘어갔다. 1627년 델 몬테 추기경이 죽자 그림은 다시 교황 베네딕토 14세에게 넘어갔다. 그 후 20세기까지 행적이 묘연하다가 1950년대에 로마 시청에서 발견되었고 현재 카피톨리노 미술관에 있다.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신성과 모독: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 미켈란젤로, 이그누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1508년~1512년

'세례자 요한'이 시스티나 예배당의 이그누디를 음란하게 패러디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청소년 요한은 인기가 높아 여러 차례 복제본이 제작되었다. 복제본 가운데 가장 정교한 것은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것은 심지어 로마 시청에서 원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원본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그림의 이력은 단순하다. 1666년 도리아 팜필리 가의 재산 목록에 기록된 후 죽 가문의 소장품으로 남아 있었다. 거의 흡사한 두 작품 중 어느 쪽이 원본인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1989년 당시 대학원생이던 미술사학자 프란체스카 카펠레티가 마테이 가의 고문서실에서 찾아낸 회계 장부의 기록으로 종결되었다. 도리아 팜필리 본은 카라바조 자신이 복제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과연 카라바조가 그렸는지 의문점은 남아 있다.


카라바조는 천재적이었으나 불안정하고 통제되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과 자주 싸움질을 하고 다녔고 그 때마다 유력 후원자들이 나서서 손을 써주곤 했다. 1604년 싸움질 끝에 사람을 다치게 해 감옥에 갇혔다. 후원자인 보르게세 추기경이 눈감아준 덕분에 간수를 매수해 탈옥했다. 그러나 숨어 다니는 상태에서 1605년 또 싸움을 벌였고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이번에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보르게세 추기경은 로마에 있지 않았고, 델 몬테 추기경은 병중이었다. 다른 후원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살인범으로 수배된 카라바조는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남부로 도망쳤다. 나폴리, 시칠리아, 몰타를 떠돌았으나 인생의 화려한 시기는 가버렸다. 1610년 교황의 사면을 기대하며 돌아오던 중 로마 근처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카라바조의 가장 빛났던 시기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은 오늘도 관람객을 향해 해맑은 웃음을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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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 예술사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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