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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23]톨레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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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23]톨레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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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는 에스파냐 왕국의 옛 수도. 마드리드 남쪽,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관광안내소의 자원봉사자 할머니는 지도에 굵은 펜으로 표시하면서 말합니다. 이곳 이곳을 가세요. 대성당, 산토 토메 성당, 알카사르…. 중세 도시답게 골목이 많습니다. 좁다란 골목 위에 높다랗게 걸어놓은 천막이 특이하네요. 그늘막. 강한 햇볕 막아주는 공중 파라솔 같습니다. 단단한 암석 위에 세워진 천연 요새로 쏟아지는 햇살이어서 그런지, 정오 무렵이면 이 좁은 골목길엔 챙그렁 챙그렁 소리가 납니다. 빛이 아니라 불에 달군 철검들이 쏟아져 내리는 거죠. 그래서 톨레도는 예부터 강철 검으로 유명한 모양입니다. 골목상점들 중엔 칼 파는 곳도 많군요.


저는 지금 어떤 그림을 보러 여기에 와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함께 세계 3대 성화로 꼽히는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입니다. 우아한 대성당 뒤의 작고 아담한 산토 토메 성당. 입구 오른쪽 벽면에 작품 딱 한 점 걸려 있습니다. 16세기 이래 그림 한 점의 미술관. 입장료는 2.8유로(약 3600원). 그래도 사람들로 늘 붐빕니다. 명작 예술품과 거기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성당의 큰 재원이 된 거죠.

백작의 본명은 돈 곤살로 루이스. 이웃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하고 산토 토메 성당에도 재정 후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자기 사후에도 후원이 지속될 수 있도록 했다네요. 깊은 신앙심이죠. 1323년 그가 임종하자 산토 토메 성당의 예배실 무덤에 안장하려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두 성인이 내려와 그를 석관 속에 직접 안장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1588년에 완성된 그림은 장례식 당시의 이적을 묘사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건 장례의 장중한 분위기를 흔드는 그림 속 꼬마아이의 시선 처리입니다. 좌측 하단의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중앙 하단에 자리한 백작의 시신을 응시하지 않고 정면의 감상자를 바라봅니다. 손가락은 백작을 가리키면서요. 그림 밖 관람객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같습니다. 소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감상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지금 백작님의 영혼은 천국에서 예수님의 심판을 받고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고 계십니다.’

이런 기법은 <천지창조>나 <최후의 만찬>이 보여주는 엄숙함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그림 속에 묘사된 주인공은 그림 아래 석관에 잠들어 있고, 그림을 그린 그레코와 그의 어린 아들은 그림 속에 들어가서 16세기 이래 500년 간 살고 있습니다. 그레코의 어린 아들이 바로 관객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소년입니다. 그림 속 수많은 인물 중 그레코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는 것은 감상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23]톨레도에서

알카사르. 즉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때의 일화가 가슴을 울립니다. 여러 언어로 적혀 있는데 내용은 이런 겁니다. 1936년 7월, 프랑코 휘하의 모스카르도 대령은 사관생도들과 함께 톨레도 성을 힘들게 지키는 중입니다. 외곽을 포위한 인민전선은 대령의 16살 아들을 생포하여 전화로 협박을 합니다. 나는 인민전선 바르델로 소령이다. 투항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이겠다. 아빠, 저 루이스에요. 루이스야, 오! 내 아들. 스페인 만세를 부르고 주님께 기도해라. 그리고 자랑스럽게 죽어라. 예, 아빠. 스페인 만세! 주님 만세!


어린 아들의 희생까지 감내하는 비정한 부정(父情) 때문인지 프랑코 군대는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낸 뒤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그러고는 이 공간을 성역화 하는 데 주력해서 오늘에 이릅니다. 모스카르도 대령은 조국을 위해 어린 아들까지 희생한 위인으로 포장됩니다만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프랑코 군인들이 벌인 무수한 살인 만행을 덮는 수단으로 루이스 이야기를 활용했다는 겁니다.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도 진실은 가려집니다. 600년 전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네요. ‘그림 속 아들’과 ‘전화기 속 아들’은 인간 본성의 성스러움과 광기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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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나오는 길 광장 입구에서 세르반테스 동상을 만납니다. <돈키호테> 출간 400년을 기념하는 동상이군요. 다가가서 책 위에 손을 얹어 봅니다. 성스러움, 비정함, 순정, 광기. 인간 내면의 파란만장한 감정들이, 14세기의 성스러운 죽음과 20세기의 광기 어린 죽음이 뒤엉켜 밀려옵니다. 이율배반의 역설. <돈키호테>를 뮤지컬로 만든 <맨 오브 라만차>(1965)의 명곡 <이룰 수 없는 꿈>이 손끝을 타고 올라오더니 몸이 점점 뜨거워집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이상을 향한 무모한 도전. 그래도 인간만이 그 길을 간다는 숭고한 ‘인간 독립 선언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독립하나요? 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돌파하는 것. 인간이 꾸는 꿈의 정의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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