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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15] 피스테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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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15] 피스테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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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테라(Fisterra). 유럽의 땅끝마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서쪽으로 사흘을 더 걸어 대서양 코앞까지 가야 길이 끝나는군요. 가야지요. 이 길 끝까지 가보아야지요. 내 나라 동쪽 땅과 남쪽 땅은 가보았지만 서쪽 땅은 가보지 않았던 터, 해 떨어지는 마지막 땅이 그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 수천 수만리를 달려 물 만나 길 멈추는 산의 심정은 어떨까요? 용(龍)이 끊어지는 곳. 산의 나이 수억 년 동안 품어 안고 키운 억조창생 생명의 넋들이 손에 손 잡고 건너자 해도 건널 수 없는 곳. 나라의 가장 오래된 서정시 '공무도하가'의 한 구절 생각납니다. '님이시여, 건너지 마라 하는데 기어이 건너시네.' 물 앞에서 목 놓아 노래 부르던 옛 여인의 마음처럼, 존재의 심연을 훌쩍 넘어가는 길이 과연 죽음밖에 없는 것인지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끝'을 넘어서는 진정한 초월을 생각한 분들. 부처와 예수를 제 몸으로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정주의 시 '꽃밭의 독백' 한 구절에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는 게 있습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곳. 그곳에서 시인은 꽃을 향해 문을 열라고 소리칩니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물론 여기의 꽃은 이상 세계의 상징이죠. 개벽(開闢)! 새로운 세계의 열림!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개벽의 길을 가겠다고 간절히 외칩니다. 초월을 꿈꾸는 거죠. 길 걷는 이에게 초월은 무엇일까요.


일찍이 영국 낭만주의 시인 키츠가 '카멜레온 시인' 이야기를 했는데, 이는 카멜레온의 변색 능력을 찬양해 시인에게 천만 사물의 마음과 동화돼야 함을 강조한 뜻입니다. 시를 쓰려면 바위의 마음, 나무의 마음, 파도의 마음이 돼야 한다는 거죠. 행인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바삐 돌아다니며 인증 사진 찍고 오는 게 여행 아닌 줄 압니다. 발길 닿은 곳의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감 전부를 동원해 녹아들어야 되는 거죠. 느끼려고 애를 써야 이런 저런 문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개벽(開闢)을 하고 싶다면, 정신의 새벽 하나쯤 가지고 싶다면 말입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15] 피스테라에서

발길은 어느새 땅끝마을 등대를 향해 갑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습니다. 길이 끝나는 그곳. 바다가 있습니다. 벅차다 못해 가슴 전체로 밀고 들어오는 바다. 곳곳에 앉아 멍하니 바다 바라보는 바위들, 바위 같은 이들. 울다가 빛나다가, 싱그럽게 짭조름한 까마득한 저 바다. 바람과 비를 만들어내는 바다 바다 바다. 저 바다 바라보는 나도바위, 너도바위들.


절벽 위에 등산화 한 켤레 놓여 있네요. 자세히 보니 조각 작품입니다. '절대의 신발' 아닐까요? 세상 끝에서 걸음 완성한 신발. 소임 다하고 자유를 얻은 우리 생의 모든 굴레들. 낯선 표지석도 보입니다. 처음 보는 숫자, ㎞ 0,000. 뭉클합니다. 다 와서 뭉클하고, 이루어서 뭉클하고, 처음이어서 뭉클합니다. 끝에 오니 다시 시작이군요.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다가 시작되는 것처럼. 번개칼로 가슴 베인 듯 쩌릿합니다. 끝은 시작의 다른 이름일 뿐!


절벽 쪽으로 다가가니 돌무더기 속에 불 지피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소각의례군요. 자기를 붙들었던 거추장스러운 것들, 세상 끝까지 걸어와 태워버리나 봅니다. 노르웨이 여인 스베레, 브라질 청년 가렐리. 표정이 간절합니다. 끝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주술에 걸린 걸까요. '㎞ 0,000'은 그런 힘이 있나 봅니다. 다 태워 버리고나서 새로 다시!


저 거센 바람 속에 간절히 불 지피는 사람들 보면 스스로 불타 죽은 뒤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부활의 심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전설의 새 불사조는 수명이 다해 가면 향기로운 가지와 향료들로 둥지를 만들어, 거기에 불을 놓아 스스로를 사른다 합니다. 그런 뒤 거기에서 새로운 불사조가 솟아올라 날아간다 합니다. 신비롭습니다. 유럽 바다 절벽 끝의 저들은 제 몸의 불사조를 불러내는 21세기의 샤먼일까요?


아쉽게도 석양을 기대하기 어렵네요. 구름이 점점 두꺼워집니다. 카페로 들어가 서쪽 창 앞에 앉아 넋 놓고 바다를 바라봅니다. 어느새 빗줄기가 사선으로 유리창을 칩니다. 바다의 다른 몸뚱이들일 테지요. 한몸 바꾸어 수증기로 되었다가 구름으로 되었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오는 물의 여행. 이 세상에서 저 세상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생명의 윤회와 다를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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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하려니 점원이 다가와 메뉴판에 없는 요리를 권합니다. 파도 심한 해안 절벽에 잠수부들이 로프에 매달려 채취하는 모양인데 그림으로 보니 새끼 거북이 발가락처럼 오종종 오종종 생겼습니다. 거북손. 특산품이라며 권하는데 내키질 않습니다. 그건 제 눈에는 아무래도 거북이가 물이랑 헤치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 건너는 데 신고 가는 신발인 겁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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