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공 민영환 선생 순국 이듬해 칼과 옷을 보관하던 뒷방 마루바닥을 뚫고 자라난 혈죽(血竹) 사진.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기쿠다(菊田) 사진관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사진=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충정공 민영환 선생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바로 '혈죽(血竹)'이야기다. 여기서 혈죽은 민영환이 사망한 뒤, 이듬해 그의 집안에서 발견된 대나무로 또 한번 그의 죽음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구한말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대나무가 이슈가 된 것은 1906년 7월, 자결당시 민영환의 피묻은 옷과 칼을 봉안한 뒷방에서 대나무 가지 하나가 마루바닥 틈으로 솟구쳐 올라온 것이 발견된 뒤였다. 이것은 그해 7월17일 대한매일신보에 대서특필된 이후 경향 각지에서 인파가 밀려들어오면서 매우 유명해졌다. 가족들이 대나무를 처음 발견했을 때, 대나무는 4줄기에 가지는 9가지, 48개의 잎사귀가 돋아있었다고 한다.
당장 이 대나무는 '충신의 혈죽'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대나무의 잎사귀가 충정공이 죽을 당시 나이인 45에 맞춰 자라났으므로 충정공의 혼이 붙은 것이라고 소문이 났다. 독립운동가인 박은식은 '혈죽기(血竹記)'를 남겼으며 각종 문인 학도들이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충절을 되새겼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혈죽 이미지는 과거 고려왕조가 멸망했을 당시, 마지막 충신이라 일컬어졌던 정몽주(鄭夢周)의 선죽교 이야기가 모티브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선죽교는 원래 선지교(善地橋)라 불렸는데 정몽주가 태종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당해 그 혈흔이 떨어진 자리에 대나무가 자라났다고 하여 선죽교(善竹橋)라 고쳐부르게 됐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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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민영환의 혈죽이 큰 반향을 일으키자, 일제는 의도적으로 근거없는 헛소문이라 일축하면서 조사라는 명목하에 집안에 들어가 대나무를 조사, 아예 뿌리채 뽑아버렸다. 이에 민영환의 일가에서 이 혈죽을 광목천에 싸서 몰래 보관하다가 1962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해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됐다. 당시 일본인 사진사가 찍은 혈죽 사진도 함께 전시돼있다.
혈죽 이야기를 담고 있던 민영환의 고택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혼란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며 완전히 사라졌으며 오늘날에는 조계사 입구 우정국로변에 설치된 '민영환 집터' 표지석만이 과거 충정공의 자택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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