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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67]세운상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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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67]세운상가에서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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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대학시절 제 통학로였습니다. 상가와 아파트를 겸한, 이 건물 3층 한쪽 편을 걸어 학교를 오갔지요. 종로와 퇴계로를 잇는 '공중가로(空中街路)'였습니다. 아주 긴 육교였습니다. 이 건물을 지나면 청계천, 다음 건물 옆길을 다 빠져나가면 을지로. 상가 하나를 더 통과하면 남산 밑이었습니다.


 무척 오랜만에 이 길을 다시 걷습니다. '다시 세운, 세운(世運)상가'입니다. '세운'은 온 세상 기운을 다 모은다는 뜻이었다지요.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지려고 안간힘을 쓰던 1960년대, 근대화와 산업화의 기념비와도 같은 집이었습니다. 국내최초의 주상복합단지였습니다. 건물과 건물로 1Km 쯤을 이어놓은 보도(步道)였습니다.

 판잣집과 밤거리의 여인들로 가득하던 거리에 세워진 신세계였습니다. 이 건물 전자상가의 화려한 불빛과 음향이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교실이 변변치 않던 나라에, 이곳은 훌륭한 학교와 실험실이 되어주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탱크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지요.


 상가 위의 아파트는 연예인과 부유층, 고위층 인사들이 주로 사는 최고급주거였습니다. 창을 열면 남산 혹은 북악산이 보이고, 문을 열면 햇살이 쏟아져 드는 중정(中庭)이 있는 집. 삼일빌딩이 나라 안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던 시절, 서울 복판에서 동서남북을 굽어보며 사는 맛이 예사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수근(金壽根) 씨의 기획이었습니다. 국회의사당 건축설계안 공모에서 1등을 차지하고, 워커힐과 자유센터를 설계하는 등 일취월장하던 젊은 건축가의 야심찬 구상이었지요.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제'의 집합주택을 본떠서 서울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공중정원을 포함한 입체도시를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공공건축으로 의도된 이 프로젝트는 상업적 이기주의와 경제논리를 이기지 못하고 토막이 났습니다. 당연히 이 '공중가로'도 끝까지 이어지질 못했지요. 건물과 건물을 전부 다리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계속 걷자면, 계단을 내려가서 건너편 계단을 다시 올라가야 했습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67]세운상가에서

 공중으로 내처 걷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이 길을 걷는 시간은 사뭇 즐거웠습니다. 날마다 낯설고 신기한 풍경들이 걸음을 멈춰 세웠습니다. 갖가지 좌판이 펼쳐졌고, 야바위꾼들의 감언이설이 넘쳤습니다. 바다 건너온 성인잡지들과 야한 영상들이 호기심 많은 사내들과 청소년을 유혹했습니다.


 그 시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등굣길이라 걸음을 재촉하는데, 웬 아저씨가 저를 손짓해 불렀습니다. 휴대용 탁자를 펼쳐놓고, 점을 치는 이였습니다. 그가 대뜸 묻더군요. "학생, 무슨 공부하나?" 문학을 배운다고 답했지요. 고개를 저으며 그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법 공부를 해야 할 사람이야. 전공을 바꿔."


 어리둥절해하는 제게 한마디를 덧붙이더군요. "하긴, 뭐. 문학도 나쁘진 않아. 법 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십년 쯤 뒤에 이름을 얻겠군. 문운(文運)은 사십대에 열릴 거야." 그이의 예언은 신통하게 들어맞았습니다. 등단도, 문단 활동도 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제가 살아가야 할 세상 운세를, 세운상가에서 알았습니다.


 세운상가 위로 난 길은 제 청춘 영토의 중심축이었습니다. 그 길로 청계천 헌책방 골목과 종로 서점가를 드나들었습니다. 그 길로 '공간(空間)사랑'에 가서 연극을 보거나, 프랑스문화원에 가서 영화를 봤습니다. 보신각 뒷골목 '찻집'이라는 찻집에 갔습니다. 겨울이면 신문사에 원고를 던지러 갔습니다.


 많은 장소와 공간들이 달라졌습니다. 많이도 변하고, 아주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신춘문예의 아픈 기억이 있는 H일보 건물은 아주 없어졌습니다. 선배를 만나러 다니던 대학로 붉은 벽돌 건물은 이제 더 이상 '샘터'가 아닙니다. 거기 '밀다원(蜜茶苑)'이란 아름다운 이름의 카페도 있었지요.


 둘 다 김수근 씨 작품입니다. 그이 건축의 특징 한 가지는 천정이 비교적 낮고, 내부구조가 다소 복잡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없어진 신문사와 주인이 바뀐 샘터 건물이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취향을 '자궁(子宮)회귀(回歸)' 본능의 충족이라고 설명합니다. 어머니 몸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 말입니다.


 세운상가 역시 한 시대를 낳은 자궁이지요. 가만가만 짚어보면, 이 나라를 전자왕국, 인터넷강국 자리에 오르게 한 저력도 여기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이 가상해보입니다. 착한 인공지능과 선량한 로봇의 시대도 여기서 열릴 것 같습니다.


 빛을 잃어가는 공간을 일으켜 세우려는 이들에 경의를 표합니다. 지나간 시간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공경의 태도를 가진 분들일 것입니다. 소설 같은 삶의 주인공들에게 오래 귀를 기울인 분들일 것입니다. 건축가의 길을 묻는 소년 김수근에게 누군가 이런 충고를 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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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가가 되려면 소설을 많이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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