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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지휘자, 한국 요청 거절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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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레너드 번스타인 타계 27주기

세계적 지휘자, 한국 요청 거절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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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번스타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함께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마에스트로는 한때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받아 지휘봉을 놓아야 했고 여권마저 발급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14일은 번스타인이 세상을 떠난 지 27년이 되는 날이다. 라이벌로 불렸던 카라얀이 사망한 이듬해인 1990년 10월 번스타인도 폐암으로 숨졌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하버드대학과 커티스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43년 거장 브루노 발터 대신 뉴욕 필을 지휘하면서부터다. 이후 뉴욕 필의 황금기를 이끌며 세계적 지휘자가 됐고 빈 필, 이스라엘 필 등과도 명연주를 들려줬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치적인 이유로 음악 활동을 멈춰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배리 셀즈가 쓴 번스타인의 평전에 따르면 좌파였던 그는 정치적 성향 때문에 미 국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1951년 뉴욕 필 지휘자에서 물러났다. 이 시기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지휘대에 설 수도, 작품을 발표할 수도 없었으며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고. 여권 발급마저 금지됐다. 배리 셀즈는 미국 의회 도서관의 문서와 FBI의 파일을 바탕으로 번스타인이 겪었던 고초를 조명하는데 이는 1950~60년대 냉전시대와 당시 미국 사회에 몰아쳤던 매카시즘 광풍과 맞물려 있다.


그가 음악 활동을 재개한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진술서에 서명한 뒤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진보적인 정치인을 후원했고 인권운동과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내한공연과 관련해 그의 신념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있다.


1978년 번스타인은 뉴욕 필을 이끌고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레퍼토리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 있었다. 주최 측에서는 당시 소련 작곡가의 곡이라는 이유로 번스타인에게 이 곡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이를 묵살하고 예정대로 연주했다고 한다. 지금은 가장 인기 있는 교향곡이 됐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곡이 연주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공산권 국가 작곡가의 작품이라고 연주를 금지하는 유신시대 한국의 모습에서 그는 과거 지휘봉을 놓아야 했던 매카시즘 시대의 광풍을 느꼈을 법하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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