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하균 기자] 1991년 3월26일, 지방자치 선거로 공휴일이었던 이날 우철원(당시 13살)군 등 어린이 5명은 도롱뇽 알을 채집한다고 집을 나서 와룡산을 향했다. 이들은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마을 저수지를 지나 재잘거리며 산으로 올라간 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건 초, 경찰은 가출에 무게를 두고 공사장, 폐차장 등 집을 나간 어린이들이 있음직한 곳을 수색했다. 그러나 부모들은 아이들이 가출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이들은 아이들이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라며 떠들었다는 증언과 돈 한 푼 들고 가지 않은 점을 들어 수사의 초점을 납치 쪽으로 맞춰 달라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가 계속 가출 쪽으로 기울자 부모들은 경찰이 자기들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납치 가능성을 말해주는 정황은 애써 외면하고 가출을 입증하는 증언과 정황만을 부풀려 강조하며 수사를 한편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경찰을 비난하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군경까지 동원돼 아이들을 찾아 나섰지만 방향을 잘못 잡은 초동수사와 위증,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는 등의 장난전화와 같은 어려움으로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96년 5월, 경찰은 결국 수사본부를 해체한다.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해 산악수색 48차례, 일제검문검색 43차례 외에도 복지시설, 종교단체 등 1천여곳과 가정집 1만1000세대에 대한 수색을 진행하고 성서초등학교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만9000명을 조사, 제보 570여건에 대해 확인수사를 벌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서 초등학생 실종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는가 싶었다.
2002년 9월 26일, 와룡산에 도토리를 주우러 올라갔던 오우근 씨는 산 중턱에서 사건 발생 11년 만에 유골을 발견했다.
이후 사건의 이름은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바뀐다.
유골 발굴 현장에서는 소총 탄두가 함께 발견됐다. 처음 경찰은 실종 당시 유골 발굴현장 인근에 군부대 사격장이 있었던 점으로 미뤄 오발로 탄두가 날아왔거나 어린이들이 실종 당시에 총알을 주워 갖고 있었던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이후 어린이들이 소총으로 무장한 사람에 의해 살해당했을 수 있다고 봐, 타살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하기로 했다.
그해 경찰은 부검을 통해 이들이 살해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으나, 끝내 범인을 찾지 못했다. 결국 2006년 3월 25일 공소시효 만료로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26일 오전 '개구리 소년' 사건 유골 발견 현장인 대구시 달서구 와룡산 세방골에서 '개구리 소년 유골 발견 1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는 유가족들과 전국미아실종자가족찾기시민의모임 등이 함께했다.
유가족 측은 '개구리 소년' 사건에 대해 경찰 수사가 미흡했다며 진실 규명을 위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 설치를 촉구했다.
이들은 "당시 경찰이 곡괭이와 삽으로 아이들의 유골 발굴 현장을 훼손했다. 유골 4구를 파헤쳐 놓았고 유골 1구만 감식반이 와서 조사했다"며 "유골 발견 이틀 만에 사인을 저체온증에 의한 자연사로 추정했지만 결국 경북대 법의학팀은 검사 40여일 후에 타살로 결론을 내렸다"고 경찰의 부실했던 초동수사를 지적했다.
김하균 기자 lam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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