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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그건 나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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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10여년 전 한 영화감독의 강연 때 들은 말이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의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국정원 직원이 연락을 해 와 “한 번 만날 수 있겠느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유쾌할 리 없었고,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어쩔 수 없이 긴장감이 동행했다.


막상 만나보니 국정원 직원은 매우 조심스러워 했고 자칫 예민할 수 있는 질문은 삼갔다고 한다. 그저 “영화 잘 되고 있으세요” 수준의 대화였다. 최소한의 ‘동향 파악’ 정도였을까. 어쨌든 아예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개입’의 의사는 없었던 것 같다.

그 때는 국정원이 옛 이미지를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던 즈음이었다.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가 일명 ‘미림팀’을 통해 5000명이 넘는 인사들을 도·감청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였다.


국정원장의 ‘대통령 대면보고’가 폐지됐고 테러 방지 등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는 한편 산업 스파이 대응 같은 경제 안보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려 했다. 국정원 엘리베이터에는 ‘정치 중립’을 강조하는 포스터까지 붙었다고 한다. “국내 정치 개입이 발생한다면 조직 자체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내부 직원의 코멘트가 보도되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그 때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퇴행을 거듭했다. "마음 잡고 살아보겠다"던 전과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변해 "난 원래 이래, 몰랐어?"라며 을러대는 듯 했다.


몇 해 전 인터뷰에서, 4대강 사업을 반대했던 한 교수는 자신에게 연구 용역을 의뢰한 지자체 등에 국정원 직원이 찾아가 연구비 지급 내역 등을 챙겨갔다고 했다. 국정원 직원이 직접 찾아와 “언론 매체 등에 싣는 기고문이나 활동 내용들을 미리 알 수 있게 해달라”로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정권에 반대하는 영화배우들의 나체 합성 사진을 만들어 유포했다는 대목에서 어지러운 자괴감이 든다. 명색이 국가 최고 정보기관 아닌가. 추악하고 조악하고 유치하기 그지 없는 ‘찌질이’ 짓을 그들이 하고 있었다니. 그것은 나라였을까.


구체적인 사용 내역이 공개되지 않는 특수활동비만 한 해 5000억원에 이르는 국정원이다. 누구를 위한 특권인가. 10여년 전 국정원 직원의 말대로라면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려워진 조직이다. 일각에서 '해체론'을 들고 나오는 것도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또 지나온 역사를 봤을 때 그들의 반성은 신뢰를 얻기 어려워졌다. 환골탈태는 철저한 제도적 개혁과 인적 쇄신에서 비롯돼야 할 것이다. 이제 좀 '세련된' 정보기관을 볼 때도 되지 않았나. '찌질이' 말고.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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