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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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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산동 ~ 방광)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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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길을 회상하며 되짚어 보는 것은 늘 달콤한 맛이 있다.
지난 주 걸었던 구례의 지리산 자락 오솔길을 다녀 온 후
한 주간 내내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정작 무심코 지나쳐 왔던 그 길들이
잔상이 되고 잔잔한 영상이 되어 내 가슴을 스쳐 지나고 머리를 감싸 돌았다.


묵은 김치처럼 내 속에서 발효가 되고 숙성의 과정을 거쳤나 보다.
사람들 속에는 맛을 내고 숙성시키는 장독 하나씩 있어 보인다.
시간을 우려내고 숙성시키는 장독과 같은 것이다.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춰 마치 퍼즐을 완성해 가는 것처럼
걸었던 길을 반추하면서 의미를 되새기는 즐거운 한 주를 보냈다.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바람에 휩쓸어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마치 거대한 회색 파도가 되었던 당동마을 어귀의 억새 무리들,
음지 속에 피어난 서리 그리고 그를 배려하고 길 위에 누웠던 이파리,
세상에 이것보다 더 붉은 색은 없을 것처럼 온통 동네를 불태우고 있었던 산수유 열매…….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시간은 참으로 묘한 약이라고 누군가 얘길 했었다.
그냥 그렇게 살아왔을 시간들도 음미하고 되새김질을 하면 단물이 난다.
쓰디쓴 쑥도 오래 씹으면 단물이 나겠지?
세월은 쓴 약도 단물로 만드는 재주를 가졌지 싶다.
살을 도려내는 고통스러운 나날들도 지나고 나면 달콤한 추억이 되니 말이다.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드디어 구례의 그 느리고 질펀한 맛을 볼 시간이다.
구례는 어디에서 바라보든 그 느낌이 여유롭다.


노고단에서 바라본 구례는 섬진강이 북에서 남으로 꽂히듯이 내려오다
구례장터로 꺾이고 노고단 자락에서 남쪽으로 다시 굽이치는데
여기서 만들어 낸 구례 들판은 말 그대로 기름진 평야다.


노고단에서 가랑이를 크게 벌리면 닿을 것 같은 오산에서 바라본 구례는
가히 길지 중의 길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섬진강과 지리산이 만나서 만들어 낸 구례들판을 만날 차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리재를 넘어야 한다.


효동과 탑동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구리재와 몇 시간을 씨름해야 한다.
구리재 길목에서부터는 구례의 명물인 산수유나무가 우리를 영접해 주고 있었다.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어느 마을이고 구례를 가면 온통 산수유나무 일색이다.
봄이면 병아리 색깔의 산수유 꽃이 찬바람을 막고 서 있다.
그 따뜻한 색깔 때문에 지리산의 칼바람도 무뎌졌었다.


산수유는 구례가 있었기에, 구례는 산수유가 있었기에 구례다웁고 산수유 다웁다.
산수유가 없는 구례는 무엇으로 대신 할 수 있을까?


산수유와 구례처럼 서로를 잘 어울리게 해 주는 것이 있다면 참 귀한 인연이다.
그럼으로 나에게 맞는 옷이 있는 것처럼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한층 더 멋진 삶을 연출 해 낼 것이다.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탑동마을을 빠져나와 구리재를 향하여 한참 올라가는 길목에는
오래된 산수유 군락지가 있다.


‘탁탁탁’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리기 시작하더니
가까이 다가가자 산수유 열매가 바닥으로 떨어져 마당이 붉어져 있었다.


채 중년이 되지 않은 아낙네가 그 간들거리는 산수유나무에 홀로 기댄 채
작대기로 나무 가지를 때리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아요? 나무가 너무 약해 보이는데”
“안 위험해요. 이래 뵈도 나무가 강해요”
“올라가지 않고 밑에서 마구 흔들면 떨어질 텐데요”
“그렇지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열매가 상처를 입게 되고 상품 가치가 없어요”
“이렇게 힘들게 따면 돈이 되나요?”
“돈은 안 돼요. 그냥 집에서 약으로 쓰고 차도 만들고 하기 위한 것이지요”


가는 나뭇가지에 의지한 채 흔들거리는 산수유 아낙네를 뒤로하고 구리재를 넘었다.


임도와 숲길이 반복하여 교체하면서 오르는 구리재는 광의면과 산동면의 경계다.


구리재에 서니 구례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젖힌 모습의 병방산이 오산아래에 서 있다.
날개가 있다면 한 번의 날개 짓으로도 저 들판에 내려앉을 수 있을 만큼
들판이 가깝게 보였다.


구리재 너머 첫 동네 난동마을은 산수유색 물감으로 칠해져 있는 것처럼
동네가 온통 산수유 열매로 덮여져 있었다.


텅 비어 있는 동네에 산수유나무가 사람을 대신하여 동네를 지키고 있다.
빈 집 대문을 두드리니 산수유나무가 문을 열어 주었다.
동네 어느 집인들 산수유는 가족이다.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봄에는 마을이 어떠했을까?
온통 노란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겠지?
지붕도, 길도, 밭과 논도,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에도 온통 노란색 일색이었겠지.


그리고 어디를 가든 노란색을 잊지 말라고 말해 주었겠지.
그러면서 노란 손수건을 내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겠지.


누군가가 말했다. 길에는 누군가의 상처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당동마을로 가는 과수원 길은 까치밥으로 남은 감이 바람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저 상처가 아물면 봄이 되리라.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연거푸 몇 번 거듭하더니
언덕배기에 날 홀로 서게 하였다.


오늘은 유난히 묘지를 많이 스쳐 지나왔다.
억새밭에 많은 묘지들이 누워 있었다.
바람이 부니 억새는 파도가 되고 바다 되어 일렁이고 휩쓸어 갔다 휩쓸어 오기를 반복한다.


바람에 따라 하얀 몸매가 드러났다 숨었다 하면서
은색의 컬러가 회색으로 갈색으로 순간마다 변신하였다.
공동묘지 위에 서 있노라니 나는 마치 狂人이라도 된 듯
억새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졌다.


저 무덤의 주인공들도 오늘은 행복하였으리라.
이처럼 장단에 맞춰 쉬지 않고 춤춰주는 이들이 있으니.



아, 봄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봄이 빨간색 색연필로 써 보낸 편지에 나는 은빛 억새 연필로 답장을 써야겠다.



당동마을에는 그의 붉은 화신이 도착했다고,
그가 써 보낸 편지가 온 동네 집집마다 배달되었다고,
오늘 밤에는 집집마다 그가 써 보낸 편지를 읽을 것이라고,


당동마을 공동묘지 억새 바다는 춤추고 있다고,
나무마다 옷을 벗어 던지고 다시 그에게로 달려갈 채비를 하고 있다고,
그가 편지이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편지가 되고 싶다고 …….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18] 당동마을에서 봄에게 편지를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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