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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깎아 먹을 숙제'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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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외길 건설엔지니어'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주문


'표 깎아 먹을 숙제' 풀기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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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국에 처음 온 레바논 친구가 한국의 발전이 놀랍다며 저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제가 기억을 더듬어 “이 땅에는 사계절이 있고, 천연자원이 없으며, 유교문화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겨울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원료를 사다가 내다 팔 물건을 만들지 못하면 굶어 죽을 땅에서 검약과 교육으로 버티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사계절이나 천연자원의 있고 없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검약과 교육은 온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5000년 역사에 지금이 제일 잘 사는 때라고 하는데, 그 뒤에는 소 팔아서 자식 공부시킨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계셨습니다. 한 마리 있던 소를 팔아서 큰 아들 공부시킨다는 것은 소가 하던 일을 부모가 한다는 뜻입니다. 자식들은 손에 흙 안 묻히고 살게 하겠다는 간절한 염원의 덕으로 지금 그 손자 손녀 세 명 중 두 명이 대학을 나옵니다. 마치 장교 두 명에 사병 한 명 있는 군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농민은 늙어버렸고 노동자는 일자리에 걸맞지 않게 공부를 많이 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제조공장과 건설현장에서는 면장갑을 낄 한국 사람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저수지가 없던 시절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치면 농민은 하늘을 탓했지만 하늘에 대고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인 왕이 절망과 분노에 찬 백성들을 달래는 방법은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라는 기우제 퍼포먼스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제1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던 19세기 초 영국에서 가내수공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기계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았다’며 기계를 부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농민의 경우와 다른 점은 노동자들에게는 절망과 분노를 풀어버릴 대상, 즉 공장주가 있었고, ‘노동은 사고 파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상의 도도한 물결이 현대사를 장식했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이 사회적 양극화를 더 심화시킬 것이라는 주장과 우려가 많습니다.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국민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나라마다 지도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기존의 산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지만 동시에 한 쪽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었고 삶의 질이 높아졌음은 이론이 아닌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번 혁명도 그럴 것인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일이 얼마나 생길지 모르는 상태를 리스크학에서는 ‘unknown unknowns’라고 정의합니다. 지금 한국은 경제문제로 인한 사회적 갈등에 안보문제까지 겹친 매우 리스크가 큰 상태입니다. 리스크 관리는 리스크의 근본 원인을 찾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근본 원인으로 착각하면 엉뚱한 대책이 나오게 되어 더 큰 위험에 빠지거나 문제를 악화시키게 됩니다.


새 정부는 “이게 나라냐”의 근본 원인을 적폐로 규정했습니다. 적폐의 원인이 제도적 결함 때문인지, 운영하는 사람의 문제인지를 잘 가려야 합니다. 차는 좋은데 사고가 났다면 운전자의 잘못이지만, 비슷한 사고가 계속된다면 차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비리의 인적 청산을 우선하고, 근본원인을 찾는 노력은 뒤로 한다면 시스템 혁신은 요원해집니다. 민심을 달래는 데는 인재(人災)로 몰아가는 것이 편하고 쉽지만, 자꾸 인재로 몰면 결국 정부 불신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신임 국토부 장관이 주택투기 근절을 내걸었습니다. 그런데 부동산에 대한 내공이 쌓인 아줌마들과의 싸움에서 대개 정책입안자들이 졌습니다. 정책입안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지식을 전수하였다면, 아줌마들은 대니얼 카너먼의 지혜로 무장한 겁니다. 게다가 공직자 청문회에 나온 공직후보자들도 선공후사(先公後私)가 아닌 선사후공(先私後公)이라는 인간적 본능을 보여주면서 믿음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돈 쥐고 답답하면 찾아가던 곳이 용한 점쟁이 집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정부 정책을 소개하는 홈페이지를 찾도록 해야 합니다. 최저임금정책 등으로 증대된 소득이 소비로 연결되지 않고 집값 대출받은 것부터 갚을 알뜰주부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현재의 비정상적 주택경기를 안착시키려면 이분들이 안심하고 소비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투기와 투자는 확실한 경계가 없습니다. 국토부 장관은 다주택자들에게 집을 팔 시간여유까지 배려해 주었지만, 그분들은 그 돈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고민이 깊을 겁니다. 저는 회사 다닐 때 부서에서 사업계획서를 들고 오면 “이게 자네 개인 사업이면 집 담보로 은행 돈 빌려서 투자하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투기를 투자로 돌리는 바람직한 물꼬를 터주는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과 국회의원들은 “이게 내 돈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화두처럼 생각하면 바른 답이 나올 것입니다.


건설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던 1962년(1인당 국민소득 87달러)에 설립된 건설부는 2008년(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에 ‘건설’이라는 명칭이 없어진 ‘국토교통부’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7월 부임한 김은경 환경부장관은 ‘지속가능한 개발’을 많이 연구한 분으로 ‘이제 인프라는 건설에서 관리로 넘어가야 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큰 흐름으로는 동의하지만, 관리가 무엇을 뜻하고 그 속에 뭐가 담겨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국토교통부의 수자원 업무를 환경부로 넘기는 것도 추진한다 합니다. 제도적으로는 국토부와 환경부 간의 업무 이관이지만, 장관들 간에 조정하던 수자원 업무가 국장들 간의 업무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나라이건 환경부는 기본적으로 환경보호가 주임무인데, ‘한국은 토건국가였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장관 휘하의 공무원이 개발과 환경을 균형있게 다루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4대강에 대한 논쟁도 신임 환경부 장관의 토건국가 의식과 연관이 깊은 것 같습니다.(2011년 5월 김은경 지우 대표 기고문 “지속가능발전 - 토건국가를 극복하는 경제, 사회, 환경의 통합적 접근”)한편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던 신도시 조성공사는 제가 근래 경험한 가장 큰 토건사업으로서 국토균형발전정책의 산물입니다. 신임 장관의 정의에 따르면 이 사업은 당시 정부가 건설업자들과 미리 짜고 시작한 일이 아니므로 토건국가사업이 아닌 게 됩니다.


국민들로부터 가장 표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성과는 ‘질 높은 삶’인데, 최저임금제도를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5000만명 인구가 4만달러 시대에 도달한다면 그에 걸맞은 ‘질 높은 삶’을 누릴 인프라를 갖추는 데 연간 약 200조원(5000만명x4만달러의 10%)이 필요하다는 것이 선진국의 통계적 사실입니다. 우리 후대들이 학력과 무관하게 먹고 사는데 바람직한 산업 중에 관광도 있습니다. 관광의 기본은 질 좋은 물과 전기, 안전한 교통, 편리한 정보, 치안 등입니다. 그런 사회인프라를 구축해서 젊은이들이 창업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도 정부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라 곳간 돈은 늘 모자라기 마련이어서, 표를 많이 받을 ‘질 높은 삶’을 유권자들에게 제공하려면 돈 많이 버는 기업으로부터 세금을 걷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고 천생 민간자본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나중에 정경유착이라는 누명을 쓰지 않고 공공성 원칙을 지키자면 ‘질 높은 삶’에 투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누명 여부를 떠나서 어느 정부이건 선거를 의식해서 인기 없는 정책에 손을 안 댄 것도 적폐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비리의 근본원인이자, 더 큰 폐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인기 높을 때 청산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길이 남을 공적이 될 것입니다.


공공기관의 갑질에 대한 정부의 청산 의지도 단호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정부 의지의 표현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2조에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공무원들은 표를 안 찍어 주겠지만 국민들은 표를 줄 겁니다.


앞으로 5년간 전기요금은 올리지 않는다 합니다. 한국은 전기요금이 전기 만드는 원료 값보다 싸기 때문에 여름엔 긴팔옷, 겨울엔 반팔옷을 입고, 비닐하우스에서는 연탄보일러 대신 전기온풍기를 씁니다. 이걸 건드리면 국민들이 표를 안 찍어 주겠지만 이런 국민적 적폐도 청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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