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노미란 기자] 전세계 중앙은행이 고민에 빠졌다. 최근 각국의 경제 성장률은 대부분 견조한 흐름을 보이고 있지만 인플레이션은 좀처럼 회복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 등 중앙은행들이 설정한 2%의 물가상승률 목표치 달성은 요원해 보인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중앙은행들은 초저금리와 유동성을 공급을 위한 통화 정책이 투자와 소비를 촉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09년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양적완화(QE)를 통한 대대적인 자산 규모 확대에 착수했다. 2014~2015년 디플레이션이 유럽을 위협했을 때에는 ECB가 그 길을 그대로 걸었다.
Fed의 선택은 효험이 있었다. ECB도 채권매입이 경제성장을 이끌고 고용을 늘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효과는 거기까지였다.
노동시장 긴축에 따른 임금상승 압력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필립스 곡선은 이제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미국과 일본은 낮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임금 상승률이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임금이 상승하는 데도 미국의 물가는 전문가들의 기대와 달리 요지부동이다.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에는 저유가가 원인으로 풀이됐지만 유가가 어느정도 회복된 후에도 인플레이션은 낮은 수준에 그치고 있다. 또 다른 구조적인 이유는 아시아 지역 등의 값싼 노동력으로 효율적인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소비자물가지수(CPI)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품목의 가격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온라인 구매의 활성화로 인해 소매업체들의 이익률이 감소한 것도 한몫했다.
'인플레이션의 실종'은 유로존과 일본에서 두드러졌다. 미리 정해둔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에 빨간불이 켜진 일본은행(BOJ)과 ECB은 곤경에 빠졌다. 특히 ECB는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에 도달하려면 양적완화를 포함한 비정상적 통화정책을 정책을 지속해야만 할 상황이다.
미국은 그나마 문제가 덜 심각하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유럽과 일본 보다 높다. 물가 안정과 완전고용이라는 목표를 가진 Fed는 절반의 성공을 자축하며 점차 금리를 인상할 수 있었다.
유로존의 인플레이션이 특히 저조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2007년 이전 버블 시대에 유로존 주변국가들은 높은 실업률과 지나친 임금 인상에 골머리를 앓았다. 유럽 주변국의 상황은 물가가 안정되고 임금이 정체된 독일과 특히 대비됐다. 유럽 주변국의 경쟁력은 당연히 떨어졌다. 수출이 줄고 자본 유입이 감소하며 어려움은 가중됐다. 반면 독일은 기록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주변국들은 독일에 비해 경쟁력을 갖기가 더 어려워졌다.
ECB는 평균적인 유럽 국가를 대상으로 통화정책을 적용해야 한다. 불균형은 빨리 해소돼야 한다. 대부분의 유럽 정책담당자들도 재조정을 환영할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2% 인플레이션 달성 여부가 아니다. 양적완화는 위기 때의 정책이다. 오늘날 유럽 경제 환경은 몇 년 전과 전적으로 다르다. 금융 시장은 활황이고 경기는 디플레이션 위험 없이 확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최근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낮다는 발언을 했다. 시장은 ECB가 마이너스 금리 정책과 채권매입 프로그램을 끝내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ECB는 황급히 이 같은 해석을 부인했다.
이는 분명한 실수다. 해가 다시 비추는데 폭풍에 대비한 정책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ECB가 통화 정책을 완전히 뒤집을 필요는 없다. 단지 디플레이션에 대응한 승리를 선언하고 비상 대책을 마무리하면 된다.
다니엘 그로스 유럽 정책연구센터 소장 / 전 유럽의회 정책 자문
ⓒ Project Syndicate / 번역: 노미란 기자 asiar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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