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해묵은 경제시스템 걷어내기…이헌재 전 부총리의 제언
- 대기업 위주의 경제…관점 전환이 먼저
- 광범위한 전환점에서 선 한국경제
- 주류 헤게모니 해체부터 고민해야
"총수 구속되고 대기업이 어려워지면 한국 경제가 몰락 할 텐데 걱정이에요."
박근혜 게이트로 S기업 총수가 구속된 뒤 서울 모처에서 만난 한 대기업 과장의 한 마디에 같은 자리에 있던 대다수의 회사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돈 많은 대기업 총수들이 허투루 돈을 쓰는 건 못 마땅하지만,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 국가와 정부가 이들을 보호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안 그래요?"
혼잣말처럼 물음을 던졌다. 총수가 구속되는 것과 대기업이 무너지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대기업이 무너진다고 한국이 어려워질지 의문이라고.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총수가 있어야 공격적으로 사업도 하고 투자도 해요. 대기업이 세금 내고 일자리 만들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뭣도 모르는 시민단체는 적대적이고 정치권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사업해서 국부를 책임져 온 대기업 총수들을 굳이 구속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건지 원…."
매우 익숙한 논리다. 이 논리를 섣불리 반박했다간 색깔론에 집단 린치(?)도 각오해야 했다. 세대를 불문하고 한국경제와 대기업을 바라보는 시민의 인식은 이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자칭 전문가들이 진영의 프레임에 갇혀 논쟁을 할 때도 '주류'의 주장은 이를 명분으로 한다. 주류의 경제정책이 다양한 소수 의견을 뭉개고 수십 년 동안 거대한 시스템을 지배할 수 있었던 강력한 헤게모니였다.
주류의 논리가 강력하게 지배해 온 한국 사회가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정치, 사회, 문화는 물론 경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런 시기에 필요한 덕목은 지배적 관념에 대한 성찰과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전자를 통해 지나간 일을 복기하면서 놓쳤던 것들을 발굴해야 하고 후자를 통해 각종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찾아야 한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이원재 재단법인 여시재(與時齋) 기획이사의 대담을 담은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는 일자리, 산업, 주거, 교육, 소득, 외교, 통일 등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점의 변화를 유도한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세대에 필요한 국가를 말한다'는 부제대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고민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주류의 헤게모니를 해체하고 생각의 폭을 확장할 기회를 만날 수 있다.
국가는 기업 아닌 개인 향해 있어야
학벌 등 작은 기득권 집착도 문제
차기 세대 혁신적 시도, 기다릴 여유 필요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일은 이제 더 이상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아니다"는, 성장 제일주의 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 전 경제부총리의 주장으로 대담은 시작한다. 그는 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동시에 나타나는 인구절벽, 불평등 심화, 계층ㆍ세대 갈등 심화는 그간 양적성장에 천착해 질을 담보하지 못한 결과라고 꼬집는다. 그리고 지금 위기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시스템 자체고 이를 벗어나지 못하면 미래 세대는 재앙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위기의 근원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며 인허가권(특허제도)으로 대표되는 '렌트(지대ㆍ地代)' 재량적 배분의 수혜를 입으며 성장한 대기업 중심의 불공정한 경제시스템에서 찾았다. 1960년대 이후 50년 이상 지속되면서 성장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었고 위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통적인 줄 세우기 방식의 경제시스템을 역대 정부가 여과 없이 답습했던 게 지금의 퇴행적 흐름을 만들어 갔다는 의미다.
경제주체와 국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수많은 이견이 존재하지만 앞으로 국가의 역할은 산업 또는 기업이 아닌 '개인'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전 부총리의 관점은 의미가 깊다. '대기업이 망하면 안 된다'는 주류의 담론을 정면으로 반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전 부총리는 본인이 구조조정을 주도했던 대우그룹 사태를 빗대 "노키아가 무너졌지만 핀란드는 망하지 않았고, 제너럴모터스(GM)가 망한다고 미국이 잘못된다고 믿는 사람도 없다"면서 "설사 '삼성이 잘못되면 한국이 망한다'고 믿는다 해도 삼성의 비중이 더 커진 다음에 잘못되면 국가의 위험부담은 그만큼 더 커진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재벌기업이 '궁핍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평가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 전 부총리는 50년 전 그대로인 제조업 생산체제와 관료화된 조직 체계로는 직원 수를 줄이고 협력업체에 갑질을 해서 비용을 줄이는 방법 이외에는 답이 없다고 진단한다. 그러니 기득권을 누리고도 망할 기업은 망하게 두고 혁신 기업으로 이를 대체하는 게 이득이고, 국가는 근로자와 협력업체들이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는 게 가장 효과적인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작은 기득권'의 해체도 진영의 프레임을 넘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재벌기업 등 큰 기득권만큼 경제ㆍ사회 전반의 경직성을 키운 또 하나의 축이기 때문이다. 발전국가에서 대한민국 구성원들은 자식세대가 자신들보다 더 잘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시스템의 유연함이 유지될 수 있었으나 그러는 사이에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모든 구성원이 직업, 학벌, 집 한 칸, 땅 한 뙈기에 매달리는 기득권이 돼 버렸다는 진단이다.
소득 불평등 문제는 기본 소득을 과감하게 끌어올려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면서 영세업자들에 일정한 지원을 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제안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대원칙을 기초로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라이프 사이클에 맞춰 다양한 고용형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차별을 해소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대담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일자리 절벽과 이익의 분배, 사회적 가치를 기준으로 투자하는 금융 시스템, 실리적 외교ㆍ통일 그리고 한국형 정치제도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 전 부총리는 앞으로 중요한 관점은 국가의 '재원'이 아니라 '비전'에 맞춰야 하고, 정부는 실패의 비용을 사회화하겠다는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앞선 세대는 변화에 직면한 다음 세대의 혁신적 시도를 여유 있게 기다려줘야 한다는 당부도 덧붙인다.
이 전 부총리는 다음 세대를 돕겠다는 일념으로 재단 '여시재'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는 경험과 고민을 토대로 한 이헌재 전 부총리의 의견에 이원재 기획이사의 풍부한 사례와 논리가 더해져 이해하기 쉽고, 첨예한 갈등 관계에 놓인 사안에 대한 제3의 해법도 엿볼 수 있다. 광화문 촛불로 시작된 변화에 속도가 붙었다. 진짜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생각과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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