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 붙이며 헌화까지…'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경찰 추산 800여명 모여
여성폭력과 살해 멈출 수 있는 정부 대책 촉구
[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김민영 기자] "혐오는 남성과 여성을 가릴 문제가 아닙니다. 한 존재를 혐오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으로서 이 자리에 나온 건 여성 혐오를 해결하는데 일조하고 싶은 마음에섭니다.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맞아 이날 서울 신논현역 6번 출구를 찾은 위승범(19)씨의 말이다. 위 씨는 혐오의 문제는 남녀가 아닌 인권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17일 오후 7시 신논현역 일대에는 지난해 강남역 인근에서 희생된 20대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인파가 몰렸다. 여성은 물론 남성들도 곳곳에서 보였다.
이날 추모식을 찾은 다홍이라는 예명을 쓰는 20대 여성은 "지난 1년 간 무엇이 바뀌었는지 잘 모르겠다"며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참석했다"고 말했다.
추모사를 맡은 책은탁(예명·여)씨는 "우리의 비통함은 1년이 흘러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며 "그러나 우리의 명랑한 용기 또한 1년이 흘러도 계속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생존 이상으로 생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등학생 김신아(18·여)씨는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며 "지난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을 붙였는데 그걸 혐오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강남역 10번 출구까지 이어진 행진에서는 경찰 추산 800여명의 시민이 몰렸다. 추모 참가자들은 10번 출구에 다다르자 한 쪽 벽면에 포스트잇을 붙이며 하얀 국화를 한 송이씩 바닥에 놓기 시작했다.
포스트잇엔 다양한 메시지가 실렸다. '1년,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페미니즘은 결집했다', '페미니즘은 내 생존권을 위함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될 거야',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안전한 사회, 우리가 꼭 만들거야', '여성이여서 죽었습니다. 그게 다 입니다', '왜 우리는 당연한 권리를 희망해야 하는가' 등이다.
여성단체 '강남역10번출구' 소속 활동가 이지원씨는 "1년 전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여성이라서 맞고 성폭력 당하고 죽는다는 걸 안 이상 그냥 살아갈 수 없다"며 "다시는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잘못된 건 바꿔야 한다는 얘길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앞서 여성단체들은 이날 오후 12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현장에는 60여명의 여성들이 모였으며 강남역 사건 당시 강남역 인근에 붙었던 포스트잇 내용을 인용해 만든 현수막을 들었다.
기자회견문을 통해 단체들은 "우리 사회는 지독하게도 여성살해의 본질을 보려 하지 않았다"며 "대책을 논의해야 할 때 경찰과 정부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이 여성혐오에 기인한 범죄가 아님을 주장하는 데 급급했고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규정해 성차별적 사회의 책임에 침묵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러나 여성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모이고 행진하고 외쳤다"며 "자발적으로 결성된 수많은 페미니스트 그룹들이 생겨났고, 서로의 존재는 용기가 됐다"고 말했다.
단체들은 여성폭력과 살해를 멈출 수 있는 정부 대책을 촉구했다.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1002명의 여성이 살해되고 1037명의 여성이 살해될 위험에 놓였다. 이들은 "성 평등과 인권이 실현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근본적 변화를 이끌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김세정 불꽃페미액션 활동가는 "여성들은 여성이라서 당한, 생활 공간에서 일어난 그 죽음을 우연히 피해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동안 여성들은 집 안에서, 밖에서, 낮에, 밤에, 사람이 적은 곳에서, 많은 곳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포를 느껴야 했다"며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같이 갈 수 없고 가해자의 공격과 남성중심적인 사법 권력에 저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김민영 기자 my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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