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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8] 강릉 선교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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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8] 강릉 선교장에서 윤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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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몰아치는 대관령을 넘었습니다. 횡성을 지나자, 봄비가 갑자기 춘설(春雪)로 바뀌었습니다. 차 안에서도 한기가 느껴질 만큼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강원도 봄 날씨의 변덕스러움이야 모르지 않지만, 이것은 정말 기습입니다. 동장군(冬將軍)의 퇴각명령을 듣지 못한 파르티잔들의 결사 항전 같습니다.


 하지만, 겨울 잔당(殘黨)은 터널 앞에서 무력하게 물러났고, 고속도로 종점은 봄이었습니다. 활짝 피어난 산수유와 막 터지기 시작한 목련을 보며, 천천히 차를 몰았지요. 어디서 무얼 하다가 이제 나타났는지, 구름 사이로 저녁 해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조금은 미안해하는 낯빛이더군요.

 구겨졌던 하늘도 금세 반듯하게 펴졌습니다. 종일토록 요사스런 날씨였지만, 경포대 근처의 저녁나절은 점잖았습니다. 해도 제법 길어져서 계획된 곳을 둘러볼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눈비에 씻긴 옛집들이 한결 새뜻한 표정으로 나그네를 반겼습니다. 기왓골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조차 정겹고 평화로웠습니다.


 선교장(船橋莊)에 왔습니다. 경포대 가는 길에 있는 영동 지방 제일의 고택(古宅)이지요. 아무리 무심한 행인이라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기품 있는 장원(莊園)입니다. 율곡과 사임당의 '오죽헌'과 '김시습 기념관' 근처입니다. '허균과 난설헌'이 나고 자란 초당도 멀지 않아서 문향(文香)이 그윽한 동네입니다.

 이 집 역사의 시작은 영조 임금 무렵입니다. 충주에서 강릉으로 옮겨온 효령대군 의 후손 '이내번'이 터를 잡으려 하니, 족제비 한 무리가 홀연히 나타나 이 자리를 점지했다지요.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행과 덕행을 아낌없이 베풀었던 모양입니다. 누대로 만복이 들어와 쌓이고, 벼슬길도 비교적 순탄했다고 합니다.


 철종 시절, 선교장이 낳은 통천군수의 선정(善政)은 유명합니다. 큰 가뭄이 들자 사재를 털어서 군민 전체를 구휼했다지요. 이 집이 '통천댁'으로 불리기도 했던 연유입니다. 곳간이 크다고 인심이 나는 건 아니지요. 사랑의 샘과 배려의 창고가 깊고 넓어야 합니다. 아니라면, 곡물창고를 지키고 늘리는 일에나 정신을 팔겠지요.


 그런 집이니 식객도 많았을 것입니다. 숱한 시인묵객들이 금강산이나 관동팔경 유람 가는 길에 선교장 신세를 졌습니다. 손님 숫자만큼 시문(詩文)과 서화(書畵)가 쌓였지요. 그중에도 글씨 두 점이 백미(白眉)입니다. 하나는 추사 김정희의 '홍엽산거(紅葉山居)', 눈에 익혔다가 흉내내보고 싶은 서체입니다.


 또 하나는 연못 위의 정자 '활래정(活來亭)' 편액입니다. 해강 김규진이 썼는데 초록 글씨의 태가 여간 곱지 않습니다. 그림 같습니다. 서산 개심사 다락집 현판의 푸른 글씨를 바라보는 느낌입니다. 해강이 누구입니까. 청나라에서 연마한 솜씨로 영친왕에게 서예를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뿐입니까. 창덕궁에 산수벽화를 그렸습니다. 왕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 '천연당'을 차렸습니다. 서예가입니다. 화가입니다. 사진가입니다. 거기 하나 더 보태야겠습니다. 그래피티(graffiti) 아티스트. 금강산 구룡폭포 앞 바위에 13m나 되는 글자를 새긴 사람이니까요.


 관심 두지 않은 일이 거의 없고, 모르는 게 별로 없었을 사람, 김규진. 한마디로 르네상스적인 인간이었지요. 천하의 팔방미인이 고작 간판 글씨 한 점 써놓고 떠나진 않았을 것입니다. 사진도 찍고 그림도 남기고 했겠지요. 그가 묵는 동안, 선교장의 사랑채 '열화당(悅話堂)'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집을 건사하자면, 일마다 자연의 뜻을 묻고 간곡히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산수 정기와 음덕을 받지 못하면, 집은 금세 쇠하지요. 선교장은 경포호수를 마당처럼 펼치고, 솔숲과 대숲을 병풍처럼 둘렀습니다. 기둥 하나도 위아래를 가려 세웠고, 마루 한쪽도 나뭇결과 무늬를 살폈습니다.


 선교장 주인들은 조상이 이룬 터전의 의미와 미덕을 옳게 새길 줄 알았습니다. 주인노릇이 그리 간단하고 녹록한 일이 아님을 진작 알아차렸습니다. 자신들의 집이, 재물보다 사람이 더 많이 모이는 집이란 사실에 더 큰 긍지를 가졌습니다. 눈 밝고 지혜로운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음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마침내 '열화당'이란 당호(堂號)에 숨은 뜻까지 깨쳤습니다. 원래는 일가친척들이 '화기애애한 정담'을 나누는 집의 의미였지요. 그런 곳을, 세상의 현자(賢者)를 모시고 시절인연의 깊이를 재는 장소로 확장시켰습니다. 학문과 예술을 논하며 깨달음의 촌수와 항렬(行列)을 가리는 공간으로 승격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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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열화당 앞에 섰습니다. 같은 이름의 현대식 건물을 생각합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출판사지요. 건축, 사진, 미술 등 예술분야 책들을 전문으로 펴냅니다. 선교장 후손들의 일터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가업을 잇고 있는 셈이지요. 선교장 옛 일이 '시간의 건축'이었다면,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생각의 건축'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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