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생산자물가 6년來 최대폭 급등…농림수산품이 견인
[아시아경제 오종탁 기자]주부 A씨는 얼마 전 고기를 사러 대형마트에 갔다가 정육 코너에서 한참을 서성여야 했다. 소·돼지고기 가격은 설 명절 전보다 떨어지긴커녕 더 비쌌다. 닭고기를 살까 했더니 이마저도 부쩍 올라 있었다. AI 여파 때문이란다. A씨는 "치킨값도 오르겠구나" 하며 결국 3살 아이가 먹을 소고기만 조금 사서 집으로 향했다.
이같이 부담스런 장바구니 물가가 앞으로도 오름세를 이어갈 예정이라는 지표가 나왔다. 지난달 생산자물가가 6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급등한 것이다. 한국은행이 20일 발표한 1월 생산자물가지수를 보면 축산물이 전월보다 6.3% 오르는 등 농림수산품이 4% 상승했다. 신선식품도 전월보다 5.2% 오르며 장바구니 물가 상승을 이끌었다.
주요 품목별로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여파에 계란값이 113.5%나 급등했다. 농산물 중에선 무가 88.9%의 상승률을 보였고 배추도 77.6% 올랐다. 수산물 중에서는 냉동오징어가 66.0%, 물오징어는 58.2% 올랐다.
생산자물가는 국내 생산자가 시장에 공급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 변동을 보여주는 통계다.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반영되는 경향을 보인다. 당분간 농수산물 가격이 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지갑 얇은 서민들은 향후 물가 전망마저 밝지 않은 가운데 울상 짓고 있다.
사상 최악의 피해를 낸 AI 여파는 최근 닭고깃값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해 AI가 전국적으로 퍼지고 지난달 31일 4890원까지 떨어졌던 닭고기(도계 1kg) 소매가는 이달 들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17일 기준 소매가는 5431원으로 짧은 기간 11%가량 뛰었다. 도계 1kg 도매가는 설 연휴 뒤부터 고공행진해 이달 1일 2666원에서 17일 3811원으로 43% 올랐다. 도 ·소매가가 오르는 데 발맞춰 이마트와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들도 9일부터 닭고기 상품 판매가를 최대 8% 인상했다.
닭고기 가격이 이처럼 오르는 것은 AI 영향의 잠복기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이상 잠잠한 AI는 한창일 때 가금류 총 3300만마리가량을 도살 처분시켰다. AI에 따른 이동 제한 조치도 상당 지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병아리 입식이 늦어지고 있다. 닭고기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닭고기 수요의 회복세도 가격 급등세를 부채질하고 있다. AI 확산세일 때 30~40% 가까이 떨어졌던 닭고기 수요는 사태 발생 이전 수준까지 회복됐다.
닭고기 가격이 오르면 자연스레 소비자들은 치킨값도 오르는 게 아니냐는 걱정을 한다. 실제로 수 년 째 가격을 동결해 온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닭고깃값 오름세가 계속되면 치킨 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일부 업체는 닭고기뿐 아니라 부재료인 무와 매장 임대료, 인건비 등도 오른 점을 감안해 치킨값 인상 여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AI 영향을 즉각적으로 받았던 계란 가격은 완연한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전국 평균 계란(특란 중품) 한판 소매가는 지난 10일까지 15거래일 연속 하락, 7892원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13일 16거래일 만에 내림세가 꺾이며 7945원으로 올랐다. 14일부터는 다시 소폭 내려 17일 7667원을 기록했다. 평년 가격(5548원)보다는 아직 38.2% 높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계란 한판이 6000원대인 점포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AI 피해가 '현재진행형'인 가운데 터진 구제역 사태는 소 ·돼지고기 가격 인상 우려도 키운다. 방역 당국의 노력에도 충북 보은 7개 지역을 포함한 전국 9곳에 구제역이 급속도로 퍼졌다. 안 그래도 한우 등심(100g 1등급·7824원) 소매가는 설 연휴 뒤(17일 기준) 2.6% 올랐다. 한우 갈비(100g 1등급 ·4861원)는 3.3% 하락하는 데 그쳤다. 두 품목 다 평년보다 21.7%, 11.4% 높다. 돼지고기 삼겹살(100g 중품 ·2002원)은 설 연휴 직전인 지난달 26일보다 7.3% 올랐고 평년보다는 15.8% 비싸다.
지난 3일 한우 1등급 지육 도매가는 1kg에 1만7699원이었다. 이어 5일 올해 충북 보은에서 첫 구제역이 발생하며 하락세를 타 17일엔 1만5746원으로 11%가량 떨어졌다. 한우 등심 도매가도 같은 기간 4만5048원에서 4만3816원으로 2.7% 내렸다. 반면 소비자가격은 7만6125원에서 7만8237원으로 2.8% 올랐다. 구제역 사태가 한우 수급이나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좀더 지켜봐야 한다고 정부는 판단하고 있다.
최근 6일(14~19일) 중엔 구제역 추가 의심 사례가 발생하지 않았다. 아직 사태가 마무리된 게 아니기 때문에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방역 당국은 지난 12일까지 전국 소 283만 마리에 대한 백신 일제 접종을 완료했으며 유일하게 A형 구제역이 발생한 연천 지역을 중심으로 구제역의 돼지농가 전파 차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백신 일제 접종에 따른 항체가 생성되려면 일주일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자칫 조기 진정에 실패해 구제역 사태가 추가로 확산할 경우 소고기 가격이 들썩일 것은 자명하다.
사상 처음으로 O형과 A형 2개 유형의 구제역 바이러스가 동시 발생하면서 전국 1000만마리 규모의 돼지 농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돼지의 경우 A형 바이러스 백신을 전혀 접종하지 않아 사실상 무방비 상태인 만큼 일단 감염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다만 당국의 강력한 차단 방역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인지 돼지 농장에서는 구제역 발생 사례가 없다.
정부의 설 전후 수급 안정책, 출하량 회복 등에 이달 하락세를 예상했던 농산물 가격 또한 요지부동이다. 17일 상품 배추 1포기 소매가는 4010원으로 설 연휴 직전인 지난달 26일(3987원)보다 0.6% 더 올랐다. 양배추(1포기 상품 ·5039원)는 설 전보다 1.4% 정도 비쌌다. 마늘(깐마늘 국산 1㎏ ·1만585원), 양파(1kg 상품 ·2324원)가 설 이후 각각 5.7%, 7.4% 뛰었다. 대파(1kg 상품 ·3689원)는 1.6% 찔끔 내렸다.
오종탁 기자 ta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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