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살며 생각하며] 이미지 정치는 이제 그만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2분 24초

[살며 생각하며] 이미지 정치는 이제 그만
AD

요즘 들어 특히 절감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말, 특히 공적 언변은 그 말이 담고 있는 실질을 이치에 합당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은 며칠 전 한 신문에서 접한 글이다.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해 물었더니 A씨는 무엇보다 ‘자기집필능력’을 꼽았다. 연설문 정도는 자기가 직접 쓸 수 있어야 대통령 자격이 있다는 거다. 총리를 지냈던 이 분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나온 이야긴데 굉장히 공감이 되는 지적이었다.”


A씨의 주장에 대해 나 역시 굉장히 공감한다.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인데다 무엇보다 이번 정권에서 ‘말조차 안 되는’ 무능 대통령의 폐해를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이는 이렇듯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주장의 설득력을 전직 총리의 발화라는 사실에 무게중심을 두고 전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제 이골이 날 때도 됐건만 이런 류의 언변을 만나면 굉장히 속이 부글거린다.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거기에 충실하게 하면 되지, 왜 쓸데없이 총리직이라는 엉뚱한 허상에 기대냐는 이야기다.

물론 같은 말이라도 대통령이나 총리처럼 ‘훌륭한 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더욱 신뢰가 가고 공감이 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설득력의 원천을 말의 실질이 아닌 말하는 이의 지위나 이미지 등 ‘허상(권위)’에서 구하는 이런 태도는, 때로는 위험천만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개인을 패가망신에, 나라 전체를 거덜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땅을 팔아 넘기는 데 혈안이 된 사기꾼이 ‘장관 사모님들이 떼로 몰려와 산 땅’이라고 분위기를 잡으면, 이를 금싸라기 땅으로 믿고 쪽박 찬 경우 등이 전형적 사례이다.


의도적이든 무심코이든 이렇듯 권위에 기대 말이나 행동의 설득력이나 정당성을 구하다 보면 이번 ‘국정농단’처럼 나라를 거덜낼 참사는 상시 진행형으로 펼쳐진다. 문체부차관을 지낸 김아무개가 그랬다던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공무원이라고. CJ그룹 부회장을 아웃시킨 경제수석 조원동도 영문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VIP(대통령) 뜻인데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라고 간명하게 이유를 대고 있다. 대통령 뚯이 숨도 쉬지 말라면 두말없이 그래야 한다는 멘탈들이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멀쩡한 이를 간첩으로 둔갑시킨 간첩조작을 조직적으로 자행했던 ‘국정농단’이 판을 쳤던 것도, 바로 국가기관의 발표라는 가짜 권위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에 기반한 측면이 크다. 어디 이뿐인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20대 꽃다운 청년의 목을 짓눌러 물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경찰 공무원들은 이렇게 항변했다. 우리는 상부 지시에 따라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국정농단의 행동대원으로 나선 몇몇 장차관, 청와대수석 역시 이들과 똑같은 논리로 상부지시라는 허깨비, 가짜 권위에 기대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판박이 군상들이다.


탄핵 심판과 함께 대선 예비 후보들의 움직임도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후보간의 옥석을 가리는 검증기간이 어느 때보다 짧은 상황에서 일차적으로 선행해야 할 것은 후보들의 허상에서 벗어나 실질을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리라. 이런 관점에서 현재 거론되고 후보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후보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다.


문재인과 함께 2강을 구축하고 있는 반기문에게 쏠린 20%대의 지지는 나로서는 수수께기다. 반기문의 철학과 비전을 전혀 알 길 없는 상황에서 표출되는 이 지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한국을 10년이나 비웠던 그의 무엇을 보고 이런 높은 지지율이 나온단 말인가. 반기문의 그간 행적이 우리 사회가 열어 가야 할 새 시대의 비전과 어떤 접점이 있다는 말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엔사무총장을 역임했다는 그의 스펙에 따른 근거없는 기대라는 점이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유엔의 살림을 맡았으니 한 나라의 대통령 정도야 충분히 할 ‘깜’이지 않겠느냐는 거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허상에 불과하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어떤 철학과 가치를 구현했는지, 한국의 정치를 한국의 앞날을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지 그 실질에 대한 판단자료가 제공되어야 한다.


국내에 들어온 후 최근의 행적만으로 살펴본다면 시차적응도 덜 됐을 텐데 들어오자마자 동서남북 여기저기 다니면서 얼굴 내미는 이벤트로 일관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는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칭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히 말이라는 점에서 그 실질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구체적으로 쟁점이 되고 이슈에 대한 그만의 확실한 철학을 알 길이 없는 깜깜이 후보다. 반기문을 에워싸고 잇는 인사들 중 상당수가 과거 이명박 가짜보수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정도가 그나마 희미하게 그의 행로를 짐작케 해줄 따름이다.


지난 선거에서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를 사실상 제1공약으로 내세웠다가 당선되자마자 이를 헌신짝보다 못하게 패대기쳤다. 이렇듯 공약만 가지고서도 판단할 길이 없다. 세월호 당일 올림머리에 한 시간을 썼다는 사실은 이미지 정치의 폐단을 보여주는 슬픈 상징이다. 다시는 실상 없는 허당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 이제 이미지는 그만 가라.
류을상 논변과소통 대표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