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선 원내대표·비대위원장에 이어 첫 당대표직 피선
[아시아경제 고양(경기)=유제훈 기자] 15일 국민의당의 새 당 대표로 박지원(75) 의원이 당선됐다. 조기대선을 앞두고 제3지대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 점화된 상황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은 물론 3선 원내대표·비상대책위원장의 경륜을 지닌 박 대표가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 지 관심이 모인다.
장병완 국민의당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이날 오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제1차 전국당원대표자대회에서 박 의원이 전당원투표(80%)와 국민여론조사(20%)에서 총 61.58%를 얻어 신임 당대표로 선출됐다고 밝혔다.
경선 초반부터 독주체제를 형성했던 박 대표는 이날 투표에서도 과반을 넘긴 61%를 득표하면서 대세론을 입증했다. 전체 당원 중 60%가 호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 제3지대 등 대선 대응을 위해 박 대표의 경륜·정치력이 필요하다는 점이 이같은 결과를 낳은 것으로 풀이된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전남 진도군 출신인 박 대표는 1972년 도미해 사업으로 성공한 뒤, 미국 뉴욕한인회장,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장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박 대표의 인생은 신군부의 내란음모 조작으로 망명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 바뀌게 된다.
박 대표는 이후 김 전 대통령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고, 민주당 부대변인·대변인 등을 지내며 측근으로 부상했다. 국민의정부 출범 이후로는 당선자 대변인,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며 김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이 된 이유다.
◆대북송금 사건에서 3선 원내대표·비상대책위원장까지=하지만 박 대표는 이후 2003년 대북송금 사건에 휘말려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최종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박 대표는 당시 구속된 동안 녹내장이 악화 돼 왼쪽 눈을 잃었고, 그때부터 의안을 착용하고 있다.
하지만 박 대표는 2008년 18대 총선 도전을 통해 국회에 재입성하면서 정치적으로 재기했다. 탁월한 정보력과 정치감각으로 2008년 부터 2012년 까지 원내대표직과 비상대책위원장직을 두 차례나 맡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 박 대표는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과는 '박남매'로 불리며 각종 인사청문회에서 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文과의 악연…국민의당 기반 쌓아=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 대표는 친노(親盧) 진영의 이해찬 대표와 전략적 연대를 통해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를 대선후보로 옹립하는데 일조했지만, 이후 문 전 대표와는 불편한 관계가 됐다.
특히 박 대표는 지난 새정치민주연합의 2015년 2·8 전당대회에 출마했지만, 문 전 대표에게 간발의 차로 낙선하면서 악연을 이어갔다. 박 대표는 지난해 초 야권분열 정국에서도 결국 국민의당 행(行)을 선택했다.
국민의당에서 4선에 성공한 박 대표는 3당 체제 국회에서 특유의 정치력으로 당의 존재감을 키우는데 성공했다. 아울러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 체제가 붕괴한 이후로는 비상대책위원장직도 겸직해 당의 체계를 정비했다.
▲1942년 ▲전남 진도군 ▲목포 문태고등학교 ▲단국대 상학과 졸업 ▲미국 뉴욕한인회장 ▲평화민주당 진도군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 ▲민주당 수석부대변인 ▲민주당·국민회의 대변인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대변인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 ▲김대중 평화센터 비서실장 ▲민주당 원내대표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국민의당 원내대표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14·18·19·20대 국회의원 ▲국민의당 대표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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