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뉴욕 김근철 특파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일(현지시간) 내년 대선을 향한 출사표를 던졌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진 않았지만 올해 사무총장에서 물러나면 국내 현안에 대해 ‘한 몸 불사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냈다. 또 기존 정치권과 일정거리를 두며 민심 몰이에 나설 구상도 내비치는 등 귀국 이후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예고했다.
반 총장은 이날 자신의 임기 마지막인 동시에 한국 특파원과의 고별 간담회에서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일단 퇴임이후 행보와 목표를 국제 사회 기여가 아니라 국내 현안에 초점을 맞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반 총장은 퇴임이후 유엔에서의 경험을 살려 국제 무대에서 활동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면서도 “현 단계에선 제가 자라고 태어난 곳에 기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퇴로를 차단한 채 배수진을 친 셈이다.
반 총장은 그동안 대선 출마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피했다. 물론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적도 없다. 반 총장의 의중은 일찌감치 내년 대선 도전에 맞춰져 있었고 이를 위한 물밑 준비도 이뤄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언급은 피해왔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이날 반 총장은 대권을 향한 자신의 결기를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외교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반 총장 입에서 ‘국민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몸을 사리지 않겠다’ ‘내가 73세가 되지만 건강이 받쳐주면 국가를 위해 일할 용의가 있다’ 등의 표현이 나온 것은 의외다. 외교관이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변신해 가겠다는 의미다.
다만 반 총장은 대선 출마 선언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아직 임기가 11일이 남아 있다”며 명확한 언급은 피했다. 또 “아직은 한국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지 아직 고민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발언에 무게는 그리 실리지 않았다. 유엔 사무총장 퇴임 직후 국내 정치에 뛰어드는 것에 대한 국내외의 따가운 시선을 고려한 방어막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반 총장은 내년 1월 귀국 후 행보에 대한 구상도 내비쳤다. 일단 기존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며 차별화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반 총장은 “국민의 우려와 실망감, 좌절감은 현재 정치를 하고 계신 분에 대한 여러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고 단정했다.
그는 또 “국민이 없는 상황에서 정당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노론-소론이나 비박-친박, 동교동-상도동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도 했다.
반 총장은 일단 정치권의 주요 정치 세력과는 균형을 잡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고 친박계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의혹에 대해 “너무 심한 인격 모독이며 정치 공작”이라며 강력히 반박했다. 최근 ‘한국 국민들이 선정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적절한 시점에 기존 정치세력과 힘을 합칠 가능성을 열어뒀다.
한편 반 총장은 당분간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분노하는 민심을 끌어안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이날 간담회 내내 “국민의 진솔한 의견을 듣고 따르겠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또 귀국 이후 3부요인과 국립묘지 참배 등의 일정을 마친 뒤에는 정확한 민심을 듣기 위해 여러 지역을 방문하겠다고 밝혔다. 민심몰이를 위한 광폭행보를 예고한 대목이다.
이달 말 임기를 마치는 반 총장은 귀국 이전까지는 한국 상황을 지켜보며 향후 구상을 더 구체화할 전망이다. 그는 “일단 1월 1, 2일까지는 사무총장 공관에 머문 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한국 상황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반 총장은 “예정대로 1월 중순에 귀국할 계획이지만 아직 비행기 예약은 해두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뉴욕 김근철 특파원 kckim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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