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대 56.
예상보다 많은 차로 승부가 갈렸다. 여기저기 산발적인 환호성이 들리긴 했지만 정작 대통령 탄핵이라는 시민의 요구를 수행한 국회의사당 안 의원들의 표정은 12년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때와는 사뭇 달랐다. 여당의원들이야 침통해야 할 이유가 충분해 보였지만 야당의원들의 표정조차 그리 밝지 않았다.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는 표결 직전 ‘만약 가결돼도 웃음을 보이며 환호성 지르거나 박수치지 말아야 한다’며 야당의원들의 표정단속을 지시했다. 다수의 야당의원들은 설령 그런 지시가 없었어도 기뻐 환호성을 부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단언했다.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시켰다는 일종의 안도감은 감지되었지만 그와 함께 정체모를 침울함도 분명히 깔려 있었다. 의사당 밖에서 밤을 새워 가며 국회의 선택을 압박하던 시민들 역시 탄핵 가결 발표 직후 대한민국이 월드컵이라도 우승한 듯 환호성을 외쳤지만 그들의 표정에도 단순히 승리의 기쁨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일종의 침통함이 깃들어 있었다. 왜 이번 탄핵소추의 승자는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는가? 짧은 환호성 뒤로 밀려드는 이 무거움은 대체 무엇인가?
스포츠경기의 마지막 순간에는 승자와 패자가 가려진다. 기쁨에 상기된 승자와 아쉬움에 허탈해하는 패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승자와 패자의 일반적인 표정이다. 대부분 이긴 자는 포효하고 패자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린다. 물론 승자라고 늘 기뻐하거나 패자라고 늘 슬퍼하지 않는다. 승자도 이 자리에 오기까지 견뎌낸 고통의 시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패자 또한 패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눈물을 닦고 아름다운 미소로 승자를 축하한다. 승자와 패자의 표정을 잘 들여다보면 단순히 이기고 졌다는 결과를 넘어 그 승부를 통해 드러난 승자와 패자의 품격을 읽어낼 수 있다.
다시 탄핵현장에서 목격한 승자들의 표정으로 돌아가 보자, 목표로 했던 탄핵안이 가결되었을 때 야당의원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표정은 기쁨에 들떠있기보다는 오히려 엄중했다. 이 승리를 얻기까지 한뎃잠을 자며 피눈물을 흘려온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러려고 대통령을 뽑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동안 광장에 모여 기적 같은 시위를 이어 온 수많은 촛불이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방청석에서 탄핵투표와 가결을 지켜보던 세월호 유가족들의 탄성은 환호가 아니라 시대의 탄식이자 피울음이었다.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이 좁고 고통스러웠으므로 승리의 순간 아픈 기억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패자의 표정은 어떠했나? 탄핵가결 직후 소위 친박 의원들은 따로 모여 비박 의원들을 배신자 운운하며 성토했다. 고개를 숙이거나 패배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큰소리 치고 화를 냈다. 박 대통령은 탄핵 가결 후 가진 마지막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피눈물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알겠다”했다. 그 말을 하는 박 대통령의 얼굴에서 도무지 패자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담담하게 특검에 ‘대응’하겠다는 말에서 아직도 승복하지 않은 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련의 대통령 탄핵정국을 지켜보며 떠오르는 감정은 부끄러움[恥]이다. 부끄러움의 유무에 따라 승자와 패자의 복잡한 표정들을 설명할 수 있겠다. 승자가 그저 기쁘게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민적 자기부정을 결행해야 하는 시대적인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패자가 그토록 뻔뻔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자신이 신봉해 온 부끄러운 대통령을 인정해야 하는 부끄러움(혹은 그의 결여)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염치가 없는 사람들을 파렴치한이라 부른다. 더 이상 염치없는 얼굴들을 마주하기 괴롭다. 한 순간이라도 부끄러움을 회복한 표정을 만나고 싶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