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와 함께 당대 지성...3·1운동 등 주도했지만 나라운명 어두워지자 일제와 타협
식민지 지배 아래 판이하게 갈린 삶...세 남자의 문학으로 행적과 활동 추적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한국문인협회는 지난 8월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려던 계획을 열흘 만에 백지화했다. 순수한 차원에서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했으나 문단 안팎에서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친일 활동 전력 때문이다. 역사정의실천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등 역사·사회단체들은 이 문학상을 시대착오적 친일미화라고 규정하고 "친일 행적만 모아 따로 전집을 낼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갈등은 여전히 유효하다. 동서문화사가 늦어도 내년까지 이들의 이름을 내건 학술상과 문학상을 마련할 계획이다. 고산 편집위원은 "내년이 한국근대소설의 효시인 이광수의 '무정'이 출간된 지 100주년째 된다. 몇 가지 과오를 문제 삼아 문학적 업적 전체를 훼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한국 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동경 유학 때부터 주목받아 가인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東京三才)'로 불린다. '아시아의 런던'으로 통하던 동경에서 근대 학문을 쌓고 귀국 뒤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활동했다. 이광수는 오산학교의 교사가 됐다. 홍명희는 중국의 민족 운동가들과 교류했고, 최남선은 신문관을 세워 '소년' 등을 발간했다. 이들은 1910년 일제강점기를 맞으면서 방랑도 했지만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다. 동경 와세다대학으로 다시 유학을 떠나 '무정'을 발표한 이광수는 조선 지식인 청년의 대표로서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쓰고 상해로 탈출했다. 최남선은 민족의 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오랜 방랑 끝에 고향인 괴산에 거주하던 홍명희는 충청북도에서 최초의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동경삼재'는 이들의 행적과 활동을 상세하게 기술한 책이다. 이광수의 '그의 자서전(1936년)', 최남선의 '서재한담(1954년)', 홍명희의 '자서전' 등 자전적 글 일곱 편을 비롯해 단행본 쉰여섯 편, 논문 일곱 편을 기반으로 이들의 행보를 추적한다. 동경삼재는 문학 영역이라는 공통분모를 제외하곤 식민지의 지배 정책 변화와 해방과 분단의 시대적 상황에서 판이한 삶을 살았다. 관련 기록물에 대한 편차도 크다. 홍명희는 행적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지만 이광수는 많다. 그런데 같은 행적에 관한 기록도 시대적·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주됐다. 특히 이들이 3·1운동에 참여해 감옥에 갇히거나 중국으로 망명한 뒤가 그렇다.
이광수는 1919년 2월 자신이 쓴 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서 해외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고 상해로 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신문'의 책임자가 됐다. 그는 당시만 해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마음껏 쏟아냈다. 그해 11월 독립신문 28호에 실은 논문 '일본인에게'가 대표적이다. '한국을 강제로 영유함이 결코 일본 존립의 필요조건이 아닐뿐더러 도리어 일본의 대륙 정책과 한국에 있는 일본 신민의 생명 및 재산과 일본의 존립 자신에 대하여 큰 위협이 되고 복심의 질병이 됨이리오.'
국내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홍명희와 최남선은 감옥에 갇혔다. 병약한 몸으로 옥고를 치른 홍명희는 감형돼 출감했지만 집안 형편마저 기울어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최남선은 감옥생활을 하면서 한국 고대사와 민족의 기원에 적용한 단군과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구성했다. 이를 기점으로 서구의 근대를 전파하고자 했던 계몽주의자에서 조선의 전통을 고민하는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로 변모했다. 이광수는 1925년 이런 그를 조선주의를 강조한 역사학자 또는 조선학자라고 규정했다. 서재필과 안창호를 이어 조선의 문화운동을 이끌 인물로 꼽으며 "아직도 서른여덟 살 '청년'이기에 과거보다 더 긴 미래를 가진 이"라고 평했다.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중반부터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지만, 레닌주의에 입각해서 조선의 해방을 모색한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둘은 민족운동의 연대문제에서 일정한 견해차를 보였다. 최남선은 이광수가 포함된 민족주의 우파 진영의 독자적인 정치적 조직 결성의 움직임에 반대했다. 민족주의 우파 계열의 정보를 공유해온 홍명희와도 그가 민족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멀어졌다. 저자 류시현은 "갈림길은 민족해방운동의 한 축인 사회주의 계열과의 관계 설정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홍명희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반면에 이광수와 최남선은 민족주의 계열의 입장을 고수했다"고 했다.
최남선은 단군과 불함문화론 연구를 통해 일본인 학자의 조선에 관한 연구에 학문적으로 대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이 탈각된 학문 연구는 1928년에 조선총독부 산하 관변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의 참여로 귀결됐고, 결국 일제의 조선 지배를 합리화한 '식민사관'을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이광수는 사회주의 계열이 조선의 특수성을 부정하며 소비에트러시아의 입장을 추종한다고 비판했다. 1932년 2월 '동광' 30호에 실린 '조선 민족운동의 3기초 사업'에서 민족을 '영원의 실재'로 표명하면서, 이러한 민족에 부정적인 사회주의자들을 '얼치기 맑시스트'라고 규정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광수와 최남선은 이후 민족 독립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당대 현실을 외면하고 일제와 타협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광수는 '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된 뒤 창씨개명, 학병 동원 등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을 지지했다. 최남선도 '만선일보' 고문과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홍명희는 이 둘과 달리 지조를 지켰다. 학병 권유 강연을 하라는 일제의 강압을 피하기 위해 거처를 옮겼고, 숨어 지내면서도 한용운이 사망하자 그의 거처로 달려가 조문을 했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왜 일제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을까. 안재홍은 1949년 9월 '새한민보'에 실린 '8·15 당시의 우리 정계'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44년 봄부터 일본 측에서는 시국을 비판하면서도 그래도 어떻게 유리하게 바꿔보려는 미련이 남아 있어, 조선 측 지도층 인물에게도 상당한 획책을 하던 것이다. 당시 여운형, 송진우, 홍명희 등을 남아 있는 비협력 지도 인물로 보아 무슨 방식으로든지 사용하려는 것이 그들의 뱃속이었다." 최승만의 회고에 따르면 훗날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일을 보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제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광수는 자신이 아니면 누군가 나서야 했기에 자신이 나섰다고 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왜 그런 역할을 당신들이 해야만 했는가.
(동경삼재 / 류시현 / 산처럼 / 1만6000원)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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