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論단弄단] ‘헬 조선’을 위한 변명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24초

 [論단弄단] ‘헬 조선’을 위한 변명 윤순환 러브레터 대표
AD

그들 입장에서는 늘 말[言]이 문제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말이고,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말을 뱉는 입[口]들이다. 말과 입들을 가만 둘 수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8.15 경축사에서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그런 ‘자기 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듣고 있자니, 일단 유구무언이었다.

오십 줄에 들어선 나는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 중에 자랑스러운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뽕’ 영화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국제시장’을 보았을 때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눈물을 참지 못하기도 했었다. 대한민국, 자랑스런 산업화와 위대한 민주화의 도정(道程). 맞다!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자랑스러움 뒤에 부끄러움들이 숨어 있고, 위대함으로도 바꾸지 못한 모순과 비리도 남아 있다. 사람에게는 장단점이 있고, 사물에도 명암이 공존하는데 어찌 우리 현대사에는 위대함과 자랑스러움만이 있겠는가? 현재의 대한민국을 ‘헬 조선’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어떻게 그것을 자기 비하라고 매도할 수 있는가?


사실, 그들도 알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어지러운 세상이 이런 말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런 진실은 애써 무시한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부는 확신에 차서, 일부는 의도적으로 그런 말과 싸운다. 말과 싸우는 이유는 말과 싸워 이겼을 때 자신들의 말로 세상을 정의(定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싸우기로 작정한 대표적인 말이 ‘헬 조선’인 듯하다. 그 신조어는 (그들 입장에서는) 위험한 유언비어고 끔찍한 선동문구다. 추방하고 말살해야 할 말이다. ‘헬 조선’대신에 ‘아, 대한민국’. 이 얼마나 좋은가?


말과 싸우는 것은 결국 입과 싸우는 것이 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반대파)과 싸우는 것이다. 말을 배격하는 것은 반대파들에게는 입 닥치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이고, 같은 편에게는 반대파의 입을 다물게 하라는 얘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말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반대파를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곧잘 발전한다. 이 정권 들어 준동이 자심했던 극우 단체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말이 중요하다. 80년대 군부독재 정권이 언론에 재갈을 물렸을 때, 그에 저항했던 기자들이 만든 월간지의 제목이 ‘말’이었던 것은 상식적이며 동시에 상징적이다. 말을 막는 것은 입을 막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말들이 돌아다닐 것을 우려해 책장에 독약을 묻히기도 했고(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중국의 진시황처럼 말의 묶음(책)이나 말의 전달자(유학자)를 불태우고 생매장하기도 했다(분서갱유). 역사적으로 볼 때 말을 공격하는 쪽은 주로 권력자나 기득권자들이다. 왜냐하면 말은 물(物, 만물 또는 세상)의 거울이기 때문이고, 말로 표현됐을 때 물이 더욱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백성들도 종종 말을 공격한다. 남미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는 ‘페다고지’에서, 저항자들은 사물에 자신들만의 이름을 붙인다(naming)고 했다. 그 ‘네이밍’이야말로 세상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물을 흐리기 위해 말에 집착하는 것과 달리, 백성들은 물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말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말이 아니라 물이다. 만물이, 세상이 좋게 변하면 백성들은 안 좋은 말을 쓸 이유가 없다. 그들은 쓸데없이 신조어를 지어낼 만큼 한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을 쓰지 말자고 하는 것이야말로 ‘헬 조선’을 지속시킬 것이고, 그 말을 쓰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킬 것이다. 말문이 막히면, 모든 문이 막힌다. 문을 닫지 마라.


윤순환 러브레터 대표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