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약 40년전 영국의 펑크록 밴드 섹스피스톨즈는 'Anarchy in the UK'(난장판 영국)라는 곡을 발표했다. 지금도 펑크록의 전설로 꼽히며 많은 뮤지션들이 부르고 있는 곡이다.
70년대 암흑과도 같던 영국병 속에 방황하는 청춘의 심정을 담은 이 노래를 젊은이들의 한 때의 치기로 치부했던 당시 영국의 성인들은 자신들이 40년 후 난장판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 못했을 것이다. 유럽연합(EU) 탈퇴를 국민투표로 결정한 후 사회, 경제, 정치적 혼란이 겹치고 있는 영국의 지금 상황이 딱 난장판이다.
시계추를 40여년 전으로 돌려보자. 기자가 태어났던 1971년만 해도 영국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의 삶은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이자 대영제국의 후손들의 것이라 보기 힘들었다. 80년대 미국이 겪은 패배감은 영국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주에 세 번은 정전이 있었고 도심 주택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재들은 안 그래도 암울한 영국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그게 당시 영국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영화 '트레인스포팅', '풀몬티' 등의 영화에서도 80년대까지 영국의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양산업 구조조정에 맞서 광부들은 파업전선에 나서야 했다. 영국은 유럽의 환자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지금은 영국과 런던에 이민자들이 넘쳐나지만 그때만 해도 고향을 등지고 해외로 나간 영국인이 이민자보다도 많았다. 사회 분위기가 험악해지며 스킨헤드로 통칭되는 반이민자 범죄가 속출했다. 지금은 1000만명이 넘게 사는 런던의 인구는 1939년 이후 1990년까지 4분의 1이나 쪼그라들었을 정도였다. 지금 런던의 위상만 아는 젊은 세대들이라면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최근의 영국의 번영이 꼭 EU와 함께 했었기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사이 '철의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영국병치유정책과 북해산 원유 발견이라는 커다란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국의 번영이 스스로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영국의 자랑하는 금융중심지 '시티오브런던'에 유럽과 미국 금융사들이 진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영국 금융 위상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영국은 그저 금융빅뱅으로 판을 잘 깔았을 뿐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많은 소비자들이 찾는 레인지로버, 미니, 재규어 등 영국 자동차 업체들이 몰락을 길을 걸을 때 손을 내민 것도 독일, 인도 등 해외 투자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일본 닛산의 자동차 공장이 들어선 선더랜드에서 조차 주민들의 선택은 브렉시트였다. 이를 두고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3루에서 태어나 스스로 3루타를 친 것으로 알고 살아간다(born on a third base, think they hit a triple)"고 비꼴 정도다.
EU 역내 간 자유로운 이동을 반대하며 EU 탈퇴를 외치는 영국인과 정치인들은 스포츠분야의 변화를 곱씹어 봐야한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영국은 요트와 조정, 승마에서 단 네 개의 금메달을 따는데 그쳤다. 그런데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무려 29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이 역시 이민자들의 역할이 컸다. 당시 소말리아 이민자 출신인 모 파라가 육상 금메달을 목에 걸고 트랙에서 영국국기 유니언잭을 흔들 때 열광하던 기억은 영국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걸까.
최근 아이슬랜드에 패해 유로2016 축구대회 8강 진출에 실패한 잉글랜드 대표팀의 모습도 고립주의를 선택한 영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잉글랜드는 전원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로만 팀을 구성한다. 결과는 뻔했다. 축구 종주국은 1966년 월드컵 우승 이후 뒷걸음질만 하고 있다. 이쯤에서 영국을 구해달라고 신에게 호소한 섹스 피스톨즈의 노래 제목이 다시 떠오른다. 'GOD SAVE THE QUEEN'
백종민 국제부장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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