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최대 가치는 '진리의 추구'이다. 과학자는 지식의 최전선에서 공헌하는 사람이므로 연구에 직접 관련되지 않는 개인적 이해가 연구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지난 역사는 과학의 가치도 금전을 포함한 이해관계에 의해 크게 훼손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과 기업의 협력이 증가하면서 기업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연구자들이 받지 않은 연구자들에 비해 후원 기업의 입맛에 맞게 결과를 조작할 확률이 높다는 사례가 끊임없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만 200명이 훨씬 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제조사가 오래전부터 살균제의 독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정황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유해성에 관한 연구 결과가 고의로 조작되었는지는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지만, 이미 드러난 기업과 대학의 연구계약 및 대가 지급 과정만으로도 금전적 이익 앞에 과학적 진실은 너무나 허약할 수 있음이 다시 확인되었다. 기업의 비도덕성과 정부의 무능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마저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는데 손쉽게 사용될 수 있음에 국민들은 더욱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사적인 이해가 맡고 있는 업무 또는 공공의 이익과 어긋나는 상황을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이라 부른다. 특히 과학자나 공직자처럼 높은 신뢰가 요구되는 사람의 이해충돌은 이번 경우처럼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사실 대학의 연구자들이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기업의 이해와 보다 직결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현대 과학에서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의무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기업이 대학에 의뢰하는 용역 연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해충돌은 어떻게 근절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더 중요한 과제이다.
흔히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원안에는 공직자의 이익과 관련된 직무 수행을 금지하는 이해충돌 방지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논의 과정에서 대상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포괄적이라는 이유로 삭제되었다. 그간의 많은 경험들은 이해충돌에 관한 최선의 대처가 관리하기(manage), 줄이기(reduce), 없애기(eliminate)의 순서임을 말해 준다. 원천 금지는 가장 쉽고도 간편한 방법이지만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모든 이해충돌의 가능성을 원천 배제하는 것은 비록 그 대상이 공직자나 과학자에 한한다 하더라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리를 위해서는 먼저 어떤 이해관계가 존재하는지를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연구비 출처가 알려진 연구에 대해서는 동료평가가 좀 더 엄밀하게 진행될 것이고 연구의 객관성도 그만큼 더 담보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줄이거나 없애기 전에 널리 알리는 것만으로도 일정 수준 규제의 효과가 있음이 확인된다. 업무와 이해의 관련 현황을 먼저 파악한 후, 규제가 시급한 부분부터 줄여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김영란법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 관행을 바꾸고자 한 시도로, 고액선물 금지가 경제를 위축할 것이라는 반대 주장은 역설적으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법임을 말해주지만 이해충돌의 경우에 있어서는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던 이유이다.
과학에 한하더라도 이해충돌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매우 뒤처져있다. 기업과의 협력이 증가하는 현실에서 그것의 위험성을 대학과 과학자가 미리 숙지하고 연구 결과의 정직성과 신뢰성 못지않게 과정의 투명성을 중시하였더라면 우리는 좀 더 빨리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을 알고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기업의 이해와 직접 관련된 용역 연구에 대해서 연구비가 생겼다고 반길 것이 아니라 생명윤리위원회나 기관윤리위원회와 같은 면밀한 심의 절차를 마련했다면 어땠을까?
유사한 일을 모조리 금지하거나, 한두 명을 처벌하는 것은 매우 쉬운 대처이다. 어렵지만 정작 필요한 대처는 우리의 문제를 냉정히 진단하고 관행으로부터의 사슬을 아프더라도 끊는 일이다.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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