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제분 청부살인' 피해 여대생 하지혜의 편지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검단산에 달이 뜹니다. 꽃샘추위를 머금은 소소리바람이 살을 에이는 밤, 오래 전에 헤어진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몸은 마를 대로 말라 자코메티의 조각 같았지만 퀭한 눈, 홀쭉한 뺨으로 어머니는 웃음을 지어보였습니다. 아니 웃음을 지으려 하는데, 마른 눈에서 피눈물이 먼저 나왔습니다. 나는 달려가 그녀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165센티미터 키에 38킬로그램의 기구한 몸이 바스라질듯 내 가슴 속에 안겼습니다. 어머니의 입에선 술냄새가 났습니다. 오늘 마신 페트병 소주인지, 어제 마신 캔맥주인지, 아니면 그제 마신 막걸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몸은 술기운 하나로 이제껏 버텨온 듯 하였습니다.
세상의 일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있고, 예로부터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성긴 듯 하지만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는다)이라 들어왔지만 내 나라 대한민국에선 다 소용없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법이 무엇이며 정의는 무엇입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어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도대체 무엇이며 내 어머니는 또 무엇입니까. 하늘은 대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나라는 대체 무슨 낯짝을 지닌 것입니까. 정월 대보름 부근의 환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립니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하남의 집을 떠나지 못했던 어머니. 망녀석(亡女石)이 되어서야 이렇게 달려왔으니 반가운 건지 원통한 건지 감정이 뒤엉키며 생각이 더욱 어지럽습니다.
월드컵이 있던 그 해, 2002년 나는 스물 두살 이화여대 법학과 4학년이었습니다. 3월 6일 새벽 5시반 수영장 가는 길에 납치를 당했습니다. 두 건장한 사내가 나를 차에 태웠고 계속 저항하는 나를 마구 때렸습니다. 저항하는 나의 팔을 잡아 부러뜨렸습니다. 그들은 이곳 검단산 기슭으로 나를 끌고와 공기총 6발을 얼굴을 비롯한 머리 부위에 쏴서 죽였습니다. 주검은 실종 신고 열흘만인 그달 16일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날 내가 왜 죽어야 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고 이 불행은 끝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일이 일어날 전조(前兆)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영남제분 회장 부인 윤씨의 밑도 끝도 없는 의심이 그전부터 나를 피 말리고 있었습니다. 윤씨의 사위인 김씨는 내 이종사촌 오빠인데, 나와 그 오빠가 불륜관계라고 단정했지요. 윤씨는 그 증거를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오빠는 현직 판사였는데, 장모 윤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 맞은 편에 사위의 집을 얻어줬습니다. 그런데 나와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그 집의 방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됐고 컴퓨터엔 해킹프로그램이 깔렸으며 그 집을 드나드는 인근엔 CCTV가 달렸지요. 심부름센터 직원이나 경찰을 동원해 뒤를 캐고 나와 오빠가 같은 건물에 들어가는 사진을 찍으면 현상금을 주겠다고까지 극성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의심에 걸맞는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고, 급기야는...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 의심을 품으면 마음을 깜깜하게 하는 귀신이 생겨난다)라고 했던가요? 윤씨는 스스로의 의심을 키운 나머지 근거없는 확신에 이르렀고 나를 없애야 자신이 겪는 의심의 화근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돈권력 법권력의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무슨 일이든 저질러도 다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을까요. 자신의 조카를 끌어들여 1억 7천5백만원을 주고 살인을 청부했더군요. 그날 나를 끌고가 머리에 대고 총을 쏜 이들은 그 조카와 그의 고교동창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지금 내 글을 읽는 이들이, 이런 억울하고 기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 상상을 못하듯이 말입니다. 권력의 눈 먼 분노 앞에선 이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돈 앞에선 지옥도 대령시킬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이들은 성형수술까지 하고 중국으로 숨었으나 붙잡혔지요.
이들에 대한 재판은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요. 그해 6월 월드컵으로 사람들이 모두 정신이 없었거든요. 윤씨는 1심에서 징역 20년형을 받았고, 항소를 했는데 2심에서 무기징역이 나왔어요. 우리 가족들은 그래도 대한민국 법이 살아있구나 하며 불행의 고통 가운데서 작은 위안을 삼았다 합니다. 2007년에 다시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더군요. 살인에 가담했던 자들이 윤씨의 지시가 없었다고 말을 번복했습니다. 윤씨가 무죄로 풀려나면 자신들도 돈으로 빼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2월에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윤씨가 형 집행정지로 나와 병실에서 편히 지낸다는 뉴스가 나왔지요.
가족들은 언론으로 대응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2002년에 월드컵 때문에 소홀히 취급한 채 지나왔던 뉴스인 만큼, 세상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게 중요했겠지요. MBC2580에서 임소정기자가 먼저 수상한 형 집행정지를 알렸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두 번에 걸쳐 사건의 진실을 재조명했습니다. 윤씨와 살인범들은 모두 무기징역을 받았는데, 윤씨의 경우 남편인 영남제분 류회장이 박모 세브란스병원 교수에게 1만 달러를 건네주고 허위진단서를 뗐습니다. 윤씨는 2007년부터 유방암, 우울증, 당뇨 등 12개의 병명이 적힌 진단서를 받고 대학병원 병실로 옮겨졌더군요. 또 영남제분은 2015년 3월30일에 '한탑'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살아났다 하는군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일들이 끝도 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어머니는 두 차례 자살 시도를 했고, 아버지는 윤씨가 혹여 풀려나면 스스로 처단하겠다고 쇠젓가락을 던지는 연습을 끝도 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나의 사건 이후에 심신이 모두 피폐해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2006년 아버지가 "딸 생각만 하며 넋 놓고 있는 아내를 보는 일이 너무 힘겹다"며 강원도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결혼한 오빠가 분가한 뒤에도 하남의 집을 떠나지 않고 내가 비명에 가버린 검단산을 바라보며 살았지요. 그러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밥은 며칠씩 거르기 일쑤였고, 오직 알콜 기운으로 버텨왔을 겁니다. 취하지 않으면 원통해졌고 원통하면 다시 술을 찾을 수 밖에 없었으니 그게 무슨 삶이었겠습니까. 인생 전체가 영양실조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외롭고 괴롭고 서럽게 죽은 어머니를, 총 맞아 죽은 딸이 만났습니다. 오늘 말입니다. 14년 만에 둘은 미친 듯이 포옹하였습니다. 당신은 슬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 잘못도 없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 생이 서로를 껴안는 2월의 으스러지게 추운 달밤을 아시느냐고요. 법률가가 되고 싶었던 청운의 꿈은, 무법천지의 총질과 탈법의 권력이 다 뭉개버렸네요. 이런 나라, 이런 세상에서 꿈을 꾸고 있었던 내가 어리석었던 것인가요.
검단산 아래 마루공원 장례식장에 어머니 얼굴이 보입니다. 아아, 저 사진. 지난 2000년에 나와 여행 갔을 때 함께 찍었던 사진에서 오려낸 것이네요. 이제 내 곁에 오신다고 저 사진을 쓴 것인가요. 내가 보고싶을 때마다 꺼내보며 행복했던 한 때를 추억하던 어머니. 이제 어머니는 마루공원에 묻힐 것이고, 남양주의 납골당에 있는 나는 어머니 곁으로 갈 것이라고 하네요. 이제 우리 모녀, 떨어지지 않고 오래 같이 있을 수 있겠네요. 그날 새벽 수영장에 가기 전으로 다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아볼 수 있다면. 어머니, 울지 말아요. 또 한번의 새벽이 오고 있네요.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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