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충훈 기자]검찰이 5일 민영진 KT&G 전 사장을 구속 기소했다. 공직자에게 억대 뇌물을 건네고 중동의 한 거래처에게 명품시계를 받은 혐의다. 민 전 사장은 4500만원 상당의 스위스 명품 '파텍 필립'을 거래한 업자에게 받고 동석한 임원들도 롤렉스 시계를 받았다.
시계는 주고받기 편한 뇌물이다. 손바닥만한 케이스를 건네도 되고 슬며시 자신의 손목에서 끌러 주기도 한다. 5만원권을 비타500 한박스에 꽉꽉 채워도 6000만원 정도가 들어가는데 그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선물로 수억원대의 검은 거래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명품시계가 한정 제작되는데다 시간이 흐를 수록 프리미엄이 붙는다. 자녀에게 물려주기 쉽고 환금성도 뛰어나다.
정계와 재계가 꼭 손을 마주 잡은 우리 나라에서 시계 뇌물이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이유다. 또한 민주 국가의 국민 입장에선 자신들도 모르는 새 권력자들의 담합으로 국가가 굴러간다는 공포의 상징이기도 하다. 금딱지 시계를 비밀스레 건네받는 '금손목' 정치인들이, 일할 때 거추장스러워 손목시계조차 못 차는 '흙손목' 서민 위에 군림하는 셈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영화에서도 종종 시계뇌물이 등장한다. 2010년 개봉한 '부당거래'에선 검사 주양(류승범 분)이 명품 시계를 천연덕스럽게 받는 장면이 나왔다. 최근 개봉한 '내부자들'에서도 유력한 대선후보인 여당 정치인 장필우(이경영 분)에게 줄을 대려는 사업가 박종필(배성우 분)이 롤렉스 시계를 선물한다.
현실 역시 다르지 않다. 지난해 8월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박기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011년부터 분양대행업자에게 뇌물 시계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위블로, 해리 윈스턴, 브라이틀링 같은 최소 3000만원 이상 명품 시계를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받았다. 가족이 받은 시계 7점은 처벌 받지 않았다. 2006년 이재현 CJ 그룹 회장은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시가 3570만원 정도 하는 '프랭크 뮬러'나 '까르띠에'를 뇌물로 바쳤다.
뇌물임이 들통나 시계 대신 수갑을 손목에 차더라도 죄를 입증하긴 어렵다. 특정한 청탁을 목적으로 시계를 선물했다는 게 증명되지 않으면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준 사람은 뇌물이었다고 해도 받은 사람은 가격조차 모르고 받았던 마음의 선물이었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다만 뇌물이었음이 확정되면 시계의 가격에 따라 형량이 무거워진다.
뇌물이 아닌 선물의 좋은 예가 있다. 지난 2013년 우리나라에서 뇌물 시계의 대명사가 된 '프랭크 뮬러 쥬네브'의 창업주 프랭크 뮬러가 비공식 방한했다. 당시 '강남 스타일'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던 가수 싸이에게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명품 시계를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뮬러는 환한 대낮에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서 싸이와 식사를 하며 500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시계를 건넸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쁘고 떳떳했다. 물론 프랭크 뮬러는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가수가 자사 제품을 착용하며 톡톡히 홍보효과를 거뒀다.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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