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뒷담화카페'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이름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을 믿으시는지? 수많은 작명소들은 이런 신념 때문에 먹고사는 산업이다. 자기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개명을 생각하는 한 사람과, 홍대 부근의 술집에서 라벤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궁금증도 그런 것이었다. 정말 이름 속에 운명의 회로가 숨어있는 것일까. 예스라고 말한다면 그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세 가지 쯤으로 ‘이름이 발현하는 힘’을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름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인상이다. 이름은 그 이름이 붙은 존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우린 이름에 대한 편견들과 선입견들을 포함한 굳은 관점들을 가지고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란 제목의 드라마는 바로 그 문제를 다뤘다. 김삼순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김은숙이나 김은지나, 김수현과는 다른 어떤 촌스런 얼굴을 떠올린다. 이름이 그 소유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 현상은, 자연히 이름에 대한 선호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높이 치던 이름이 지금은 구닥다리로 바뀌기도 하고,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들을 선호하던 봉건적 환경 속에서 유행하던, 여자들의 이름은 지금은 모두 우스갯감이 되었다. ‘자(子)’자가 붙는 영자, 순자, 봉자, 복자, 덕자, 희자, 미자, 춘자 등등이 그렇다. ‘남(男)’를 붙여 그 뒤에 아들이 나기를 기대하던 희망도 마찬가지다. 말남, 정남, 순남, 복남 등등. 마치 성질난 듯이 이름을 붙여 ‘년’이라고 넣은 이름들은, 슬며시 ‘련(蓮)’으로 고치긴 했지만, 이름 그 자체가 서럽기 그지 없다. 말년, 정년, 순년, 덕년, 복년, 끝년이 그렇다.
한때 유행하던 한글 이름은 지금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이미지를 지닌다. 1.부모가 의식있는 사람이구나. 2.할머니 할아버지 되어도 그 귀엽고 예쁜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니? 요즘은 중성적인 이름이 유행이다. 은수. 진하. 명후. 태지. 지민, 현빈. 아마도 성(性)의 착종(錯綜)을 의식하는 패션이 아닐까 한다.
또 하나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자신에 대해 품는 이미지이다. 이름은 평생 동안 따라다니는 자기 암시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름이 운명에 개입한다는 논리가 아주 틀린 건 아닌 듯 보인다. 홍대의 그 친구처럼 자기의 이름이 마음이 들지 않는 경우는, 이를테면 이름과 자아가 따로 노는 경우라 할 만하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이름은 이런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정체성의 혼란이, 존재를 산만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이름에 대해 자부심을 지닌 사람에 비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살이에 자신감을 지니기에는 불리한 것 아닐까.
나 또한 내 이름에 대해 못마땅한 점이 없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거명할 때, 자주 나는 이상한 자괴감같은 걸 느꼈다. 어찌나 상스럽고 무뚝뚝하고 거만해 보이는지, 내가 왜 저런 이름으로 불리어야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그 이름과 동거하는데 합의 도장을 찍어줬다. 어쩌겠는가. 내가 ‘빈섬’이라는 이름에 애착을 보이는 건, 내 이름에 대한 깊은 서운함이 작동했는지 모른다. 빈섬이라는 이름에 안김으로써 내 존재는 덜거덕거리던 이름과의 불화를 극복했는지 모른다.
인간은 한 평생 이름을 키우고 세우는 일에 집착하게 되어 있다. 공명(功名)이란 게 그런 것이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도 안드는 이름을, 세상에 유행하도록 한다는 건 참으로 우스꽝스런 일이다. 그런데 이름은 사실, 존재보다 오래 간다. 육신이 사멸한 이후에도 이름은 돌 위에 새겨져 남아있다. 무서운 일 아닌가. 이름의 달팽이집이야 말로, 인간을 깊이 가두는 ‘삶의 무덤’같은 것이다.
그 친구와 오래 얘기한 것은 이름이 지닌 수수께끼이다. 이름도 언어로 된 것이기에, 소통을 목표로 한다. 이름은 나라는 존재를 실어나르고 유통시키는 툴이다. 그러니 발화자인 나와, 수화자인 상대. 혹은 나를 호명하는 상대와 불리어지는 나. 그 양쪽에게 의미지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성명학(姓名學)의 신념은 이름이 저절로 가지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음성학적인 힘이 있다. 어떤 이름은 가파르며 어떤 이름은 부드럽다. 어떤 이름은 낮고 어떤 이름은 높다. 어떤 이름은 맵고 어떤 이름은 싱겁다. 어떤 이름은 위태롭고 어떤 이름은 안전하다. 어떤 이름은 불이며 어떤 이름은 물이다. 어떤 이름은 우는 상이며 어떤 이름은 웃는 상이다. 이미지가 귀에 걸린다.
또, 이름은 본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형의 의미도 있고 오래 묵은 암시적 의미도 있다. 이름이 지닌 의미는 모르는 사이 풍겨나와 운명에 개입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상국(相國)은 한 나라의 재상이다. 옛날 할아버지들은 국(國)자의 음을 새겨 나를 국장(局長)이라고 불렀다. 촌로(村老)들이 아는 국장이라곤 우체국장 밖에 없으니, 나는 자연히 우체국장에 발령이 난 셈이었다. 그런데 우체국이라는 데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곳이니, 사실 신문사와 비슷하다. 그리고 지금 어영부영 ‘국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으니, 이름이 암시하는 함의를 이룬 셈이다. 이름은 또한 숫자를 품고 있다. 이 대목이 가장 심오한데, 육십갑자와 음양오행이 이름을 뜯고 풀어낸 숫자에 전류처럼 흐르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숫자들이 한 사람의 삶에 끼어드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서양 이름들에 적용해보면 참으로 얄궂다. 제임스나 퍼거슨에 무슨 사주팔자가 개입할 수 있는지. 앙드레 김에 어떤 음성학이 작동하며 어떤 의미론이 잠복할 수 있는 것인지. 이름도 신토불이의 법칙에 드는 것이니, 불경스럽게 양명(洋名)을 들이대선 안되는 것일까.
이야기가 이야기를 돌아, 경험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역자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대개 고집이 세고 자아가 강하지 않아? 혹은 받침이 없는 글자로 끝나는 사람들이 단호하고 독선적이며 역사에 큰 획을 긋는 경우가 많지 않아? 이응자나 니은자로 끝나는 사람들이 타협적이고 부드럽고 유연하지 않아? 이건 또 무슨 철학인가. 기역으로 끝나는 이름은 목구멍을 닫는다. 이름을 부르고 나면 힘이 들어가고 생각이 또렷해진다. 이런 영향일까. 받침이 없는 경우는 글자의 처음과 끝이 동일하다. 목구멍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열려있다는 얘기다. 이것이 일관성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니은이나 이응은 콧소리를 낸다. 비강(鼻腔)을 울리는 음악적인 소리다. 당연히 부드럽고 온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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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소리가 주는 암시가 이름의 주인을 그 음감대로 살게 하는 것일까. 김구, 박정희, 이승만, 노무현, 김영삼, 김대중. 역대 지도자들의 마지막 음을 음미해본다. 혹은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 끝받침을 연결해본다. 오, 놀랍게도 그럴 듯 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만나고 그리워했던 여인들의 이름이 대개 니은자로 끝나는 것이었다는 걸 발견한다. 특히 ‘현’이다. ‘현’으로 끝나는 이름에 나는 홀린 듯 마음을 내줬다. 여기에도 뭔가 있는 것일까. 내 사랑의 노래는, 김훈선생이 말하지 않더라도 ‘현의 노래’였다. 니은이 주는 긴 여운(민, 선, 진, 은, 순, 난), 이응이 주는 애교와 애틋함(영아, 정아. 경아), 미음이 주는 아름다움(이솜, 빈섬). 나는 그런 것들에 오래 천착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나의, 쐐기박는 듯한 기역자 끝받침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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