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용준 여행전문기자]레드 카펫을 깔아놓은 듯 붉은 파도가 넘실된다. 고즈넉한 숲에서 꽃무릇(석산화ㆍ石蒜花)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흰 메밀꽃의 바통을 이어 받아 이파리 하나 없는 기다란 꽃대 위에 가느다란 실타래 같은 수술이 서로를 섞어 붉은 화관을 이룬다. 가녀린 꽃대 하나에 의지해 툭툭 터져 갈라진 꽃송이는 마치 마스카라로 눈썹을 치켜 올린 듯 가볍게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며 '슬픔의 노래'를 전한다.
여
름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떠난 후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골짜기에는 마치 산불이 난 듯 온통 붉은 꽃무릇이 화려한 군무를 펼치기 시작했다.
가을을 여는 꽃으로 알려진 꽃무릇은 대체로 절기상 백로 무렵 피기 시작해 9월 중순에서 말경에 절정에 이른다.
산자락이나 풀밭에 무리지어 피는 꽃무릇은 꽃이 필 때 잎이 없고 잎이 날 때는 꽃이 없는 수선화과로 본래 이름은 꽃대가 마늘종을 닮아 석산화이다. 한 뿌리이면서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화엽불상견 상사초(花葉不相見 想思草)'의 아련함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서로 떨어져 사모하는 정인처럼 꽃과 잎이 사무치도록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로도 불린다. 하지만 분홍색 상사화는 여름에 피고 붉은색 꽃무릇은 초가을에 피는 서로 다른 꽃이다.
선운사 꽃무릇 감상은 선운산도립공원 매표소 뒤편의 생태숲에서 시작된다. 이곳에는 꽃무릇을 비롯해 수십 종의 야생화가 식재되어 있다.
이곳은 꽃무릇과 하나된 가족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는 관광객들과 한 컷이라도 더 작품을 잡으려는 사진작가들로 북적인다.
생태숲을 지나 선운사로 가는 길의 좌측 산자락을 따라 꽃무릇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 폭의 풍경화에 꽃멀미가 날 정도다. 어둑어둑한 숲과 도솔천을 수놓은 꽃무릇의 아찔한 자태에 흐르는 물과 산새조차 숨을 죽인다.
도솔천 물길을 따라 이어지던 꽃무릇은 선운사 들머리에 이르자 붉은 꽃 무더기가 활활 타오른다. 온통 불을 지핀 듯 사방에서 타오른다.
영화 '남부군'이 촬영됐다는 표지석 부근 잔디밭 너머로 붉은빛이 장관이다. 그 위를 나는 잠자리도 붉은빛이다.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근거해 지어낸 말이지만 선운사 꽃무릇에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 한토막이 전해온다.
옛날에 선운사 스님을 짝사랑하던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죽었고 이듬해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는 전설이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상징하는 이 꽃에 상사화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일지도 모른다. 꽃무릇의 꽃말이 '슬픈추억'이 된 것은 당연지사일터.
선운사 들머리에서 절집 담벼락까지 200m 구간은 평지형 계곡의 꽃무릇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계곡물에 투영된 나무와 꽃무릇의 붉은 색감이 가을 분위기를 한 껏 돋운다.
꽃무릇은 유독 절집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쓰임새가 요긴하기 때문이다.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함유돼 있어서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찧어서 바르면 좀처럼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선운사 맞은편 동운암으로 향하는 산책로 주변 산자락도 마치 불이 붙은 듯 하다. 동운암 못 미쳐 왼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뜻밖에 넓은 차밭과 만날 수 있다. 꽃무릇은 물론 물봉선, 들국화 등 들꽃들이 차밭 고랑 사이에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9월 중순부터 늦어도 10월초까지 꽃무릇을 볼 수 있지만 절정의 꽃무릇을 보기 위해서는 시기를 잘 맞춰야 한다. 하지만 선운사에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꽃무릇이 살포시 빛을 잃어 갈 때쯤이면 선운사는 또 한 번 화려한 색의 향연을 펼친다. 바로 단풍이다.
선운사로 드는 숲길은 100년은 훌쩍 넘은 단풍나무들이 빼곡하다. 거목 단풍나무가 할개치듯 펼쳐놓은 가지마다 붉은 단풍이 매달려 하늘을 뒤덮는 장관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도솔천과 선운사를 감싼 울긋불긋 오색단풍의 화려함은 꽃무릇의 그것과는 또 다른 가을을 선사한다.
선운사(고창)글ㆍ사진=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
◇여행메모
△가는길=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선운사나들목을 나와 22번 국도를 타고 15분여 달리면 선운사다. 고창나들목으로 나오면 19번 국도를 타고 들어가는데 선운사나들목보다는 10여분 더 걸린다. 선운사 꽃무릇 축제는 24일부터 시작된다.
△볼거리=학원농장은 국내 최대규모의 메밀밭이다. 봄에는 청보리로 넘실대던 드넓은 벌판이 가을엔 하얀 메밀꽃으로 뒤덮인다. 고창읍성도 있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 곳곳에 설치해놓은 스피커를 통해 춘향가 한두대목쯤은 들을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땅에서 유일하게 단풍나무숲으로 천연기념물(제463호)이 된 문수사와 고인돌유적지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먹거리=고창에는 도처에 장어집들이 즐비하다. 애초에 풍천장어는 선운사 입구의 장수강에서만 잡히는 장어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선운사로 드는 길목인 아산면 삼인리 일대에만 줄잡아 40여곳이 넘는 장어구이집이 성업 중이다. 할매집(063-562-1542), 신덕식당(063-562-1533), 산장회관(063-563-3434), 명가풍천장어(063-561-5389) 등이 알려진 집이다. 저렴하게 장어맛을 보겠다면 심원면 월산리의 '심원풍천장어 셀프구이'를 찾아가볼 만하다.
◇선운사 외 꽃무릇 명소
선운사외 꽃무릇으로 유명한 곳이 또 있다. 함평 용천사와 영광 불갑사다.
용천사 일대 꽃무릇 군락은 총 46만평 정도. 용천사 가는 길목마다 붉은 꽃무릇이 활짝 펴 붉은 꽃대궐을 이룬다. 마치 주변이 홍색 치마를 두른 듯한 장관을 이루는데 우리나라 100경 중 48경에 선정됐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나다. 용천사 꽃무릇 군락지 중 가장 정취 있는 곳은 사찰 뒤쪽 차밭과 대숲으로 이어지는 길가의 꽃무릇이다. 푸르름과 어우러져 붉은 꽃의 화려한 자태가 더욱 돋보인다. 17일부터 이틀간 축제를 연다. 영광 불갑사도 빼놓을 수 없다. 불갑사는 상사화 자생지다. 덕분에 매년 9월 중순 즈음 불갑사 주변에서 상사화 축제가 펼쳐진다. 올해는 9월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간 축제가 열린다. 불갑산에서는 꽃무릇뿐 아니라 단풍과 암자가 어우러진 멋진 가을 풍광을 즐길 수 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