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의 김산 “약산은 대단한 미남…로맨틱한 용모 아가씨들이 좋아해”
[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약산은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였으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려다녔지만 약산은 언제나 조용하였고 육체운동에도 참가하지 아니하였으며 대부분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약산은 대단한 미남이고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에 아가씨들이 그를 좋아하였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멀리하였다.”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장지락(일명 김산ㆍ1905~1938)은 약산 김원봉(1898~1958)의 상하이 시절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이 글에서 잘 어울려다닌 ‘다른 사람들’은 의열단원을 가리켰다. 김산도 한때 이 조직에 몸담았다. 약산이 조직한 의열단은 조선독립 투쟁을 선도하기 위해 암살ㆍ파괴 활동을 벌인 비밀결사였다.
의열단원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했고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고 폭탄을 투척했다.
“의열단원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아주 깨끗이 차려 입었다.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ㆍ테니스 그밖의 다른 운동을 함으로써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 연습도 하였다. 이 젊은이들은 독서도 하였고 쾌할함을 유지하고 자기네들의 특별한 임무에 알맞은 심리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오락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한 것이다.”
(김산 전기 <아리랑>에서 인용)
일제 경찰문서에 따르면 이 시기(1920년대) 상하이 의열단원들은 매일 프랑스 조계에 있는 사격장을 드나들면서 권총 발사 연습을 했다. 약산은 운동은 하지 않았지만 일요일 오후에는 상하이 교외 사격장에서 사격 훈련을 하곤 했다.
김원봉은 의열단원을 감동시키고 고무해 그들이 대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게끔 만들었다. 의열단원 김성숙은 약산이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고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으며 남들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다”며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라고 들려줬다.
1921년 9월에 조선총독부를 파괴한 김익상은 원래 용산철도국 노동자로 일하다 봉천 연초공장을 거쳐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학교가 있는 광둥으로 갔다. 그러나 비행학교가 폐쇄돼 베이징으로 왔다가 김창숙의 소개로 약산을 만나게 됐다. 약산은 김익상에게 “조선의 독립은 이천만 민족의 십분지 팔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며 “우리는 이 때에 선두에 나아가 희생이 됨이 마땅하다”고 열변을 토했다. 김익상은 약산의 말에 감격해 의열단원이 됐다.
앞서 10대 때인 중앙학교 시절 이미 열정적인 웅변으로 유명해진 약산이었다. 작가 박태원은 <약산과 의열단>에서 김원봉이 사회발전을 주제로 한 교내 웅변대회에서 “남보다 뛰어나게 열변을 토해 전교에서 유명해졌다”고 전했다.
약산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가 1913년부터 약 1년 동안 다닌 중앙학교의 스승 안재홍은 김원봉이 1930년대에 조선에서 청년을 모집할 때 이를 도와줬다가 또다시 구속됐다. 화가 나혜석도 김원봉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줬다. 나혜석은 자신과 남매지간으로 중앙학교 교사였던 나경석을 통해 약산을 소개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외에는 졸업한 곳이 거의 없지만 여러 학교를 다녔다. 서당에 다니다 보통학교에 편입해 공부했고 밀양 동화중학에 편입했다. 민족주의 교육을 하던 동화중학이 폐교되자 서울 중앙학교에 편입해 잠시 재학했다. 18세 때인 1916년 중국 톈진으로 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학교 덕화학당에 입학했다. 독일어를 배워 군사 강국인 독일로 유학간다는 생각에서였다. 중국이 연합국측에 가담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 선전포고하면서 덕화학당도 폐교됐다. 약산은 서울로 돌아왔다가 1918년 중국 난징으로 가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기독교 계통의 금릉대학에 입학했다. 여운형이 졸업한 학교였다. 약산은 1919년에는 몇 개월 동안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적을 뒀다.
약산은 3ㆍ1운동 소식을 듣고 민족의 저항 의지를 결집해 무장투쟁으로 불붙일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린으로 가서 김좌진이 군무부장을 맡은 의군부를 찾는다. 의군부는 약산에게 자신들과 함께 일하기를 요청했지만 약산은 군대를 조직할 무기를 갖추고 모병하고 훈련해 전투를 벌이기까지 너무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고 그동안 동포의 민족혼이 마비되리라고 우려했다. 약산은 핵심 인물과 시설을 타격하는 노선을 잡게 됐다. 1919년 11월 이 노선에 따라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원은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됐다.
‘암살’의 시나리오도 쓴 최동훈 감독은 “실제 김원봉은 굉장히 잘생긴 데다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살았지만 강단이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며 “그래서 ‘타짜’를 함께 한 조승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배우 조승우가 미남이라는 말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조승우는 선이 굵은 미남자 약산이 무장 독립투쟁 조직의 리더로서 내뿜은 강기(剛氣)를 보여주기에는 약한 캐스팅이 아니었을까.
(참고자료)
염인호, 약산 김원봉 연구, 창작과비평사,1993
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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