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의 부인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구보타 시게코 여사를 추모하는 행사가 국내에서 열린다. 구보타 여사는 지난달 23일 오랜 투병생활 끝에 뉴욕의 베스 이스라엘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는 구보타 여사를 추모하는 행사를 오는 5일 오후 3시에 개최한다. 아트센터 내 백남준의 스튜디오를 재현한 ‘메모라빌리아(Memorabilia)’에서 열릴 예정이다. 메모라빌리아는 백남준의 뉴욕 브룸 스트리트 스튜디오의 벽면 및 창틀을 비롯한 공간을 재현하고, 스튜디오를 구성하던 실제 사물과 문서들을 그대로 옮겨와 배치한 상설 전시 공간이다. 이날 추모행사와 함께 오는 9일까지 같은 곳에 분향소도 설치, 운영된다.
구보타 여사는 1937년 일본 니가타 현(新潟縣)에서 태어나 1960년 도쿄교육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후 시나가와의 한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중 현대무용가인 이모를 통해 오노 요코와 교류하며 국제적 전위예술운동인 플럭서스에 참여했다. 고인은 1964년 독일에서 활동하던 백남준의 도쿄 소게츠홀에서의 공연에 강한 충격을 받고 그 해 7월 새로운 예술을 갈망하며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후 뉴욕에서 백남준과 재회한 그는 2006년 백남준이 타계할 때 까지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예술가 커플로서 40여년을 함께했다. 1996년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는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백남준의 병간호에 매진하며 곁을 지켰다. 백남준의 아내이자, 본인 역시 예술가였던 구보타 여사는 1964년 초 도쿄에서의 첫 개인전 이후 뉴욕 르네 블록 갤러리, 뉴욕현대미술관(MoMA), 휘트니 미술관 등에서 ‘비디오 조각’ 개인전을 열만큼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76년)가 있고, 백남준과의 공동 작업으로는 '철이철철-TV깔대기', 'TV 나무' 등이 있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추모행사는 구보타 여사의 약력 소개, 관련 영상 상영, 백남준과 친분을 나눴던 지인 및 예술계 인사들의 추모사와 헌화 등의 순서로 진행될 계획이다. 상영될 영상 두 편은 모두 아트센터의 소장 자료로, ‘작가(artist)’로서의 구보다 시게코를 조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첫 번째 영상은 미국영화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1986년 제정한 독립영화 관계자 및 비디오 아티스트에게 수여하는 미국영화연구소상(American Film Institute Award)을 수상한 구보타 시게코의 시상식(1995년) 영상을 편집한 것이다. 마야 데렌상(Maya Deren Award)으로도 불리는 이 상의 첫 번째 수상자는 백남준이었다. 두 번째 영상은 구보타 시게코가 1999년 백남준을 피사체로 제작한 '전자 기억(Electromagnetic Memory)'이라는 비디오다. 총 27분짜리 작품으로, 젊은 시절의 백남준과의 퍼포먼스, 그리고 노년의 백남준을 교차 편집한 것이다. 또한 추모행사가 열리는 날 오후 5시 용인에 위치한 한국미술관에서도 고인을 추모하는 전시와 무용가 홍신자의 추모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구보타 여사는 지난 2007년 백남준아트센터의 건립을 추진 중이던 시절부터 백남준 탄생 80주년 행사가 열린 2012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백남준아트센터를 방문한 바 있다. 2012년 아트센터에서 그는 "지금은 남준의 작품이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잘 망가져 대중들은 정크아트로 받아들였다"며 "남준과 나는 플럭서스(전위예술운동) 정신을 공유해서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백남준의 작품이 사실은 고급 예술이며 그가 오늘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21세기 예술의 문을 열어준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남준이 살아생전 떠돌이 생활로 공장 같은 곳에서 살았는데 사후에 이렇게 백남준아트센터라는 좋은 미술관이 지어져 마침내 남편의 집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한편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의 지인들은 두 사람이 거주하던 미국 뉴욕에서 오는 10월 초 전 세계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공식 추모행사를 기획 중이다. 이 행사에는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이 참여할 예정이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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