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정부를 도와줄 수 있는 여당에서조차 그것(민생법안)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회법 개정안으로 행정업무마저 마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이 같이 밝히며 국회에서 정부로 이송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요구안(거부권 행사)을 의결해 국회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개정안은 법률 취지에 맞지 않는 정부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해 국회의 정부 견제 기능을 강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번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가 사실상 정부의 시행령 등의 내용까지 관여할 수 있도록 하고, 법원이 아닌 국회가 시행령 등의 법률 위반 여부를 심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이런 점에서 정부의 입법권과 사법부의 심사권을 침해하고 결과적으로 헌법이 규정한 3권 분립의 원칙을 훼손해 위헌 소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또 "이것은 사법권을 침해하고 정부의 행정을 국회가 일일이 간섭하겠다는 것으로 역대 정부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박 대통령은 계속해 "국가행정체계와 사법체계를 흔들 수 있는 주요한 사안으로 여야의 주고받기 식이나 충분한 검토 없이 서둘러서 진행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한 일에 앞장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부에서도 통과시키지 못한 개정안을 다시 시도하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여야 정치권을 싸잡아 비난했다.
박 대통령은 16분 모두발언 중 11분을 국회법 개정안의 문제점과 거부권 행사 불가피성 그리고 현 정치권의 당리당략적 행태를 비판하고 압박하는 데 할애했다. 특히 구태정치를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목소리톤이 높아지고 주먹을 불끈 쥐며 다소 격앙된 모습도 보였다. 취임 후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 중 가장 강도가 높은 수준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 이전에 당연히 민생 법안의 사활을 건 추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묶인 것들부터 서둘러 해결되는 것을 보고 비통한 마음마저 든다"며 "진정 정부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면 한 번 경제법안을 살려라도 본 후에 그런 비판을 받고 싶다"고 토로했다.
여당 지도부에 대한 강력한 경고와 함께 분명한 불신임 의견도 전했다. 박 대통령은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 여당의 경제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 가는 부분"이라며 "정치는 국민들의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고 국민들의 대변자이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선거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이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이 심판해주셔야 할 것"이라며 "우리 국민들의 정치수준도 높아져서 진실이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인지 잘 알고 계실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따라 향후 법제처는 재의요구안을 만들어 대통령 재가를 받아 국회에 제출하게 된다. 국회는 돌아온 법률안을 놓고 재의결 절차를 밟는다. 새누리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당론을 정할 방침이다. 새누리당이 재의결에 참여하지 않아 법안을 폐기시킬 것이 유력한 가운데,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야당과 합의한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한 퇴진 압박이 거세질 전망이어서 여당의 내분과 야당의 강력한 반발에 따른 국회파행이 불가피해졌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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