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한규 서울지방변호사회장…가천대 첫 법조인에서 서울변회 회장까지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박준용 기자] "대학 와서 보니 선배들이 리영희 선생 책 등 좋은 책을 많이 권했다. 책을 읽고 법학과 학생으로서 사회에 기여할 게 무엇일까 생각하다 법조인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26일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김한규 변호사(44·사진)는 29일 인터뷰에서 "2년의 회장 임기 동안 내가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그 '첫 마음'을 실천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엘리트들이 다수인 변호사의 세계에서 김 회장은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바로 김 회장이다. 그는 서울 상문고와 경원대(현 가천대) 법대를 졸업했다.
그는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고교 시절 반에서 56등을 한 경험도 있다. 김 회장은 "특별히 방황하지도 않았고 나이트클럽도 안가고 술과 담배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평범한 학생이었고 나름대로 공부도 했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는 얘기다. 대학도 삼수 끝에 진학했고, 법대 선택도 점수를 맞춰 갔을 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고 한다.
90학번인 김 회장은 1992년부터 사법시험에 도전해 무려 11번이나 떨어졌고, 2004년 30대 중반의 나이에 합격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여유 있는 집안과도 거리가 멀었다.
김 회장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집이 어려워져 1000만원 전셋집에 살았다"면서 "독서실·고시원 총무와 식당 아르바이트 등으로 한 달에 30만~40만원 정도씩 벌어 가며 공부했다"고 말했다.
집안의 장남이 변변한 직업도 없이 30대 중반의 나이까지 사시 공부를 이어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어쩌면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을 이어갔던 배경에는 '어머니와의 약속'이 있다.
"지방 고시원에 있다가 시험 전에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다 교통사고가 났다. 그때 나는 살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내가 합격하기를 희망했던 분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김 회장은 도전을 중단하지 않았고, 경원대(가천대) 역사상 첫 사법고시 합격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내가 합격한 이후로 5명의 후배가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명은 판사가 됐다. 하지만 로스쿨에 합격했다는 후배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법시험과 로스쿨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김 회장은 2017년을 끝으로 폐지될 예정인 사법시험 존치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입장이다. 학벌과 나이 등이 로스쿨 합격에 영향을 주는 현실에서 학벌도 변변치 않고 나이도 많으며 집안형편도 어려운 이들은 법조인이 될 길이 원천 봉쇄된다는 게 그 이유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 같은 그의 '사시존치론 진심'이 통한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은 임기 2년 동안 국민의 마음을 품는 서울지방변호사회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변호사는 인권과 정의를 실천하는 직업 아닌가. 서울지방변호사회가 그 중심에 서겠다. 공익법인 활동에 혜택을 줄 생각이다. 또 민변 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한 변호사를 '인권이사'로 모셔왔다. 인권사업에도 힘을 쏟을 생각이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박준용 기자 juneyo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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