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 문제 해결방안 첫 공유
[아시아경제 명진규 기자, 김은별 기자] "어쨌든 삼성 측의 보상안을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으니 좋네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피해자 유족인 정애정씨)
"입장 차이도 물론 있었지만 앞으로 모아져야죠. 꼭 그렇게 돼야 하고요. 오늘은 각자 의견 밝히는 첫 날이니까……." (정강자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 조정위원)
16일 삼성 반도체 라인의 직업병 피해보상을 두고 삼성전자와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가족대책위원회(가족위)가 구체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이날 서울 미근동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만난 삼성전자와 반올림, 가족위는 ▲사과 ▲보상 ▲재발방지 대책이라는 세 가지 의제에 대한 본인들의 입장을 밝히고 청문 절차를 가졌다.
지금까지 이들은 회의방식이나 사과의 진정성 등을 문제 삼아 보상안 마련에 대해 제대로 의견을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조정위가 설립되면서 세 주체가 모두 속내를 드러내고 질의응답 시간도 갖게 됐다. 협상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본인들의 의견을 공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이날 협상은 가족위, 삼성전자, 반올림 순으로 먼저 본인들의 의견을 발표하고 조정위원들이 이에 대해 질의응답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각자의 생각을 처음 듣는 자리인 만큼 협상은 5시간 가까이 진행, 오후 6시45분께 마무리됐다.
◇어디까지 보상해야 하나…첨예한 입장차= 가장 민감했던 부분은 역시 보상 대상과 범위다.
삼성전자는 백혈병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혈액암을 보상 질병으로 삼고, 여기에 기존에 회사 사업장에서 산업재해 승인 이력이 있는 뇌종양과 유방암을 추가키로 했다. 혈액암은 백혈병, 비호지킨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 다발성골수종, 골수이형성증후군 등 5종으로 보상 대상 질병은 7종으로 정했다. 가족위는 신경계와 생식계 암까지 보상 질병으로 정하길 원했고, 반올림은 모든 암과 암성 질환, 희귀난치성 질환 등 중증 질환과 불임, 자연유산, 자녀의 선천적 기형이나 질환 등 생식보건 문제까지도 보상 대상에서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보상 대상자를 선정하는 근무 기간과 퇴직자 선정 기준에 대해서도 의견차를 보였다. 삼성은 백혈병, 비호지킨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 다발성골수종, 골수이형성증후군 등 혈액암 5종은 1년 이상 재직, 퇴직 후 10년 이내 발병의 조건을 걸었고 뇌종양과 유방암의 경우 5년 이상 재직, 퇴직 후 10년 이내 발병한 경우로 기간을 설정했다. 퇴직자의 경우 20년 전 퇴직자까지 보상 대상으로 삼기로 했다. 1996년 1월 이후 퇴직한 모든 직원들이 보상검토대상에 포함되는 것이다.
가족위는 재직 중이라면 별도의 제한을 두지 않고, 퇴직 후일 경우에만 생산 공정에서 1년 이상 근무하고 퇴직 후 12년 이내에 발병한 경우로 기간을 잡길 원했다. 이외에 협력업체와 사내 하청 소속도 구체적인 피해사실을 신고해 온 경우 조정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다.
반올림은 3개월 이상 근무한 노동자는 누구나 보상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하며 퇴직 이후 20년 이내에 발병한 경우 보상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3개월 이상 삼성 사업장에서 일한 사람은 모두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소 무리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번에 삼성 측이 마련한 보상 기준이 어떤 경우에도 통용되는 일반적인 기준인 만큼, 특별한 경우까지 모두 포함해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악용될 경우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은 의견을 같이 했다. 사업장에 대해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조사 기구가 필요하며, 피해자들에게는 사과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삼성전자의 경우 성분을 알 수 없는 공급사 영업비밀 물질에 대한 수시 샘플링 조사를 실시해 해당 물질이 유해성분을 포함했는지 여부를 점검하기로 했다. 현재도 법정 유해물질은 영업비밀에 포함할 수 없도록 관련 법이 규정하고 있어 특수 물질 도입시 유해물질이 포함돼 있지 않다는 보증서를 받아 서면으로 검증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서면이 아닌 수시 샘플링 조사로 유해성을 검증키로 한 것이다. 반올림이 제시한 종합진단, 외부감사 등에 대해서도 삼성전자는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삼성전자는 퇴사 이후 발병했을시 자료 미비로 근로자들이 산재신청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도 개선하기로 했다. 안전 및 보건과 관련한 자료는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이 규정한 보존 기간보다 2배 늘리기로 한 것이다. 회사에 불리한 자료지만 근로자들을 위해 보존 하겠다는 것이다. 2년짜리 자료는 4년, 3년 자료는 6년, 5년 자료는 10년으로 늘리고 최대 30년 이내까지 보존할 계획이다.
가족위는 재발방지를 위해 삼성전자가 기금을 출연, 건강재단(가칭)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건강재단 구성원은 9인으로 이사장은 삼성전자측이 추천하고, 구성원 9명은 삼성과 가족위, 반올림이 골고루 추천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길 원했다. 삼성 측은 "현재 재단 설립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진정성 있는 사과', '노조설립' 문제 또 수면위로=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뜻은 함께했지만, 협상 과정에서 과거에도 계속 논란이 됐던 사과의 진정성 문제 등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거의 10년여간 끌어온 문제가 또다시 반복되자 교섭 참가자들은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이날 반올림은 "삼성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하려면 부실한 안전관리, 산재인정 방해와 작업환경에 대한 정보왜곡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하는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삼성 측은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밝혀지는 문제였다면 지금처럼 논란이 길게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인과관계를 따져 사과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좀 더 사회 통합적인 차원에서 보자"고 답했다.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사업장과 직업병간 인과관계가 밝혀진 사례가 없는 만큼, 조사는 병행 진행하되 이미 직업병을 얻은 근로자들에게 보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가족위 역시 "현재 피해자들 중 산재를 인정받은 경우도, 인정받지 못한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원인을 따져 밝혀진 경우에만 사과를 받을 수는 없다"며 "인과관계도 중요하지만 좀 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구체적인 보상이나 재발방지 논의를 한 후에 완결적인 사과를 하면 된다"며 "사과를 하면서 시시콜콜하게 따지기 시작하면 문제해결에 몇 년이 더 걸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반올림은 삼성전자가 노동조합의 설립과 활동을 방해하지 않고, 교섭을 통해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독립적인 노조가 일터의 안전보건이 제대로 관리되기 위한 필수 요소라는 주장이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이에 대해 "직업병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는 상황에서 노조 설립까지 요구하는 것은 중복 요구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재계 관계자 역시 "노조 설립 요구는 현 조정절차 과정에서는 무리한 요구"라며 "노조 설립 요구의 경우 현 조정절차가 아닌 다른 기회에 얘기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김지형 위원장은 "오늘 대화한 결과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의견을 모을 수 있는 내용도 있었고, 상당한 시각차이를 갖고 있는 것도 확인됐다"면서도 "상대방 입장을 처음 공식적으로 접하는 시간이었고, 그만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됐다고 믿고 싶다"고 전했다.
이어 "사과 문제는 과거에 편항된 문제고, 대책과 예방은 미래지향적, 보상은 과거와 미래 문제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문제"라며 "협상 당사자들이 직접 제안을 구두로 전달해주셔서 합리적인 권고안을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한 참고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전자는 반올림, 가족위, 조정위 구성원을 기흥 사업장으로 초청해 참관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반도체 사업장 환경을 협상 주체자들이 둘러보고,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한 취지다. 각 협상주체별로 2~3명이 대표로 기흥 생산라인을 직접 둘러본 뒤에 현장 간담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후 28일에는 각 교섭 주체별로 2시간씩 조정위와 개별적인 면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오전 10시~12시, 반올림은 오후 3시~5시, 가족위는 오후 7시~9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조정위는 이날 교섭대표 외에도 참고발언을 할 수 있는 인원들이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명진규 기자 aeon@asiae.co.kr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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