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해체로 본, 진보정당史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광복 이후 한국 진보정당 역사는 희망과 좌절로 채워져있다. 진보정당은 지난 70년간 대중정당의 길을 수차례 모색했지만 냉전과 분단이라는 엄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숱한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해방 당시 한국 정치 지형은 좌우의 이념 스펙트럼이 폭넓었다. 하지만 좌우의 이념은 남북분단 상황과 얽히면서 제주4ㆍ3사건, 여수ㆍ순천 사건 등 극렬한 좌우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구성,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우의 균형은 급격히 오른쪽으로 기울면서 제도권내 진보정당은 자리잡기 어려운 정치구조에 놓이게 됐다.
한국 정치에서 제도권 진보정당의 시초는 1956년 창당한 조봉암의 진보당을 들 수 있다. 사사오입 개헌 파동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무리하게 3선을 추진하자 조봉암은 반보수 혁신정당을 표방하며 진보당을 세웠다. 진보당은 당시 보수 정당이 주장했던 무력 북진 통일에 맞서 평화적 방식에 의한 통일, 공산독재와 자본독재 모두 반대, 생산과 분배의 합리적 통제를 통한 민족자본의 육성 등을 표방했다. 3대 대선에서 조봉암은 23.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예상밖의 선전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8년 진보당 4대 총선을 앞두고 진보당은 평화통일론이 국시에 위배될 뿐 아니라 북한 간첩과 접선했다는 이유 등으로 핵심간부가 검거된 데 이어 정당 등록이 취소됐다. 조봉암은 사법부로부터 1심에서 5년형을 받았지만 2심에서 사형으로 판결이 바뀐 뒤 대법원의 재심청구가 기각된 다음날인 1959년 7월31일 사형 당했다.
진보정당은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들어선 군사정권 하에서는 제도정당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진보정당을 새롭게 만들려는 움직임이 계속 있었지만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다. 민주화 이후 정치지형이 지역주의에 따라 나뉘게 되면서 합법적인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하지만 진보정당은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1988년 민중의 당, 1990년 민중당이 결성됐지만 당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유효득표를 얻지 못했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이 결성되고 권영길 후보가 출마해 30만표를 득표하는 등 성과를 내면서 정당 구성을 위한 조직을 확보했다.
민주노동당은 국민승리21을 근간으로 2000년 1월 창당했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총선에서 전국적으로 1.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출마한 지역 21곳에서는 평균 13.1%를 득표하는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3.98%(97만표)를 득표했다. 이어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노당은 정당명부식 비례투표제 등의 영향으로 비례후보 8명, 지역구 2명이 당선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3%(71만표)로 5위에 그친 뒤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넘어갔지만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대규모 탈당 사태가 벌어졌다. 분당 후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5석(지역 2석, 비례 3석)에 그쳤다. 탈당 인사들을 주축으로 한 진보신당은 1석도 얻지 못했다.
분열된 진보정당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탈당한 심상정ㆍ노회찬 의원들이 세운 통합연대, 참여정부 인사들이 합쳐져 통합진보당으로 규합됐다. 통합진보당은 19대 총선(2012년)에서 13명 의원(지역구 7명, 비례 6명)을 배출했다.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부정경선 논란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고, 일부 인사들이 탈당해 정의당을 만들었다. 이석기 전 의원을 비롯한 당원들이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고 헌법재판소로부터 정당 해산 판결을 받으면서 통합진보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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