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빛나기 위하여 포도(鋪道)가 있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돌의 포도. 원수의 뒷모습처럼 빛나는 비. 나의 발자국도 비에 젖는다.
나의 쓸쓸함은 카를교 난간에 기대고 만다. 아득한 수면을 본다. 저무는 흐름 위에 몸을 던지는 비.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안개 같다. 카프카의 불안과 외로움이 잠들어 있는 유대인 묘지에는 가보지 않았다. 이마 밑에서 기이하게 빛나는 눈빛은 마이즈르 거리 그의 생가 벽면에서 보았다.
돌의 길. 돌의 벽. 돌의 음악 같은 프라하 성. 릴케의 고향 프라하. “비는 고독과 같은 것이다.”
엷은 여수(旅愁)처럼 번지는 안개에 잠기는 다릿목에서 낯선 그림자가 속삭인다.
“돌의 무릎을 베고 주무세요. 바람에 밀리는 비가 되세요.”
중세기 순례자의 푸른 방울 소리처럼 목소리는 따라온다.
“그리고 당신이 돌의 풍경이 되세요.”
젖은 포도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빛 목소리와
비에 젖은 지도의 일기.
프라하 칼프펜 거리는 해거름부터 비였다.
허만하의 '프라하 일기'라는 시인데, 여기 나오는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표현이 시집 제목으로 뽑혔다. 프라하의 저곳을, 나도 걸었기에, 일기처럼 적어간 저 기록이 마치 내 입에서 흘러나온 문자처럼 느껴진다. 옛 도시의, 돌로 이루어진 도로들은 아름다웠지만 불편했다. 카를교를 걸으며 나도 비를 맞았던가. 카프카의 생가에서 '이마 밑에서 기이하게 빛나는 눈빛'을 나도 보았다. 하지만 그가 들었다는 "비는 고독과 같은 것이다, 돌의 무릎을 베고 주무세요. 바람에 밀리는 비가 되세요. 그리고 당신이 돌의 풍경이 되세요"라는 말은, 온전히 허만하의 것이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가 써놓은 '칼프펜 거리' 때문에 고통받는다. 과연 저런 거리가 있었던가. 네이버를 뒤지고 구글을 돌아봐도 찾을 수 없는 '거리'이다. 겨우 찾아낸 것은 KARPFEN인데, 이건 독일어로 그냥 잉어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체코는 크리스마스 때 잉어튀김과 잉어요리를 먹는 전통이 있고 이 무렵 잉어를 사기 위해 큰 시장이 열리기도 한다는 기사가 있다. 그렇다면 그런 잉어시장이 열리는 거리 이름일까. 알 수 없다.
저녁답 비에 젖은 칼프펜 거리. 거기서 그는 비가 장좌불와한 스님처럼 꼿꼿이, 선 채로 죽는 것을 보았다. 죽음이 존재가 평지와 같은 각도로 쓰러지는 굴복이라고 대개 이해해온 머리에, 저런 비의 죽음은 한 바탕 타격이다. 창(槍)과도 같이 노기등등한 속도와 포즈로 쏜살같이 달려와 지상에 꽂히며 죽음을 맞이하는 비의 최후. 이것이 비장해지는 까닭은, 그의 시와 그의 삶이 은유 위에 올라타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해석하거나 해명하지 않고, 마치 수직으로 박히는 비명처럼 순간의 운명을 아끼지 않고 거둬가겠다는 표명...직립보행하던 인간의 존엄사 선언. 그래서 저 직립의 죽음은, 곧게 편 허리만큼이나 신성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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