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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세상의 이름을 다는 사람(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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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편집기자는 세상의 일에 이름을 다는 사람이다. 시시콜콜한 일에는 시시콜콜한 이름을 달고, 거창하고 어마어마한 일에는 대문짝만한 이름을 다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나 사물에 이름을 단다는 것은, 드디어 그 일과 사물의 머리를 올리는 일이다. 사물이 소통을 시작하는 그 놀라움을 김춘수는 '꽃'이란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지만, 이름을 붙이는 모든 일은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신문의 제목은 일본 말투로 미다시(見出し)라고 한다. 보기 쉽도록 튀어나오게 하는 것이다. 보기 쉽다는 것은 보는 사람의 입장이며, 튀어나오는 것은 보이는 쪽의 입장이다. 두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소통이 된다. 튀어나왔으나 보기 쉽지 않다면 제목 다는 편집기자가 바보짓을 한 것이며, 튀어나오지 않아서 보기 쉽지 않다면 편집기자가 할 짓을 하지 않은 것이다. 튀어나왔으나 생각없이 지나친다면 독자가 외면하는 것이며 튀어나오지 않았는데도 궁금하지도 않다면 독자가 무심한 것이다. 제목을 세상의 눈깔이라고 하고 기사의 창(窓)이라고 하는 것은, 제목은 '문제를 보는 힘'과 그 보았던 것을 세상에 유통시키는 장(場)임을 강조한 말이다. 눈깔없는 신문과 창문없는 지면은 생각할 수도 없지만, 가끔 그것과 진배없는 것을 만들어놓고는 퇴근하여 밥숟가락 드는 뻔뻔스런 편집기자질도 한다.

신문의 '문'자는 들을 문(聞)이다. 글자로 가득한 신문이 어찌하여 들을 문인가. 문(門)에 귀(耳)대고 서 있는 것이 들을 문이다. 신문은 먼저 생각하여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나서 생각하는 것이다. 듣는 것이 철저해야 생각도 온전해진다. 어찌 하여 판단보다도 취재를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판단 오류나 생각의 횡포들은 제대로 듣지 않고 입체적으로 취재하지 않은데서 나왔다는 경계가 아닐까. 함부로 들으면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말할 수 밖에 없다. 듣는 것이 엄정하고 분명해야 쓰는 것도 그렇게 되며 독자들이 받아서 읽게 되는 내용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다. 편집기자는 저 들은 것에 입을 다는 일이다. 들을 것이 진실이어도 입이 삐뚤어지면 도루묵이다. 입이 어설프고 어눌해도 큰 일이며 입이 경박하거나 지나치게 과묵해도 마찬가지다. 편집기자는 문(聞)을 문(門)으로 옮기는 게이트키퍼이다.


자신이 문인지도 모르는 벽같은 편집기자, 자신이 문이 아니라 문(文)이라고 생각하는 편집기자, 문(紊)에 빠져 헤매는 난리난 편집기자가 너무 많은 게, 세상을 문란하게 만들어온 게 사실이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잘못 이름붙였을 때 생겨나는 모든 혼선의 괴로움. 편집기자 하나가 세상을 크게 밝히고 크게 어지럽힌다는 것을 편집기자들은 안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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