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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 29.삼십분만이라도 천국에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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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세 감독 시드니 루멧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전에>가 던지는 불편한 스토리텔링


[빈섬의 알바시네] 29.삼십분만이라도 천국에 있기를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노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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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작하는 신문기자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에 종종 강의를 나가는데, 그때마다 무척 공들여 소개하는 영화가 있다. 33세의 젊은 감독 시드니 루멧의 데뷔작품 ‘12명의 노한 사람들(12 Angry men, 1957년작)’이다.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이 꼭 지녀야할 치열한 ‘진실열정’이라 할까, 사실에 접근하는 태도를 이토록 생생하게 웅변하는 현장교육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과서의 딱딱한 냄새를 떠올린다면 그건 성급하다.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친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18세 스페인계 미국소년에 대해 12명의 배심원들이 최종판결을 내려야 하는 토론을 하는 현장이다. 11명은 유죄라는 의견을 냈고, 나머지 한 사람만이 그래도 아직 어린 소년의 목숨에 관한 일인데 예의상이라도 좀더 긴 토론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낸다. 나머지 배심원들은 짜증을 낸다. 주말에 미뤄둔 할 일도 있고, 야구 구경도 가야 하고, 찜통같은 날씨에 오래 앉아있는 일이 힘겹다.

더 토론하고 자시고할 뭐 있는가. 보나마나 뻔한 사건이 아닌가. 미국의 달동네에서 거칠게 자라난 외국계 불량소년이 저지른 패륜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소년에 대한 적대감을 돋운 지점은 바로, 이민자 가족이라는 점과 아버지를 죽인 끔찍한 행위 자체였을 것이다. 시민 배심원들은 건성으로 사실관계를 따져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당시 사건현장에 대한 증인들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고, 범인의 흉기라는 물증도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물건임이 밝혀진다. 처음엔 길티(guilty)라 외치던 사람들이 하나둘 ‘낫 길티(not guilty)’로 돌아선다. 마침내 무죄와 유죄가 11대1까지 간다. 끝까지 길티를 주장한 사람은, 알고 보니 비슷한 또래의 아들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아버지였다.


언론이 패륜이나 성적 일탈에 관한 사건에 광분하고, 흉악범이나 살인범이라 지목받는 사람에게는 지상(紙上) 판관이 되어 서둘러 사형을 언도하는 행위, 대중적 기분을 업고 응징의 선동자가 되어 마녀사냥의 앞줄에 서는 풍경을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본다. 진실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겹의 껍질을 조심스레 벗겨보려 하기는커녕, 제풀에 흥분하여 이성을 잃는 것을 용기나 정의라고 믿는 이들이 아직도 많고, 남의 잘못을 몰아치면서 그 규탄과 저주의 말들을 뱉는데는 능란하면서도, 스스로가 믿고 있는 신념이나 굳게 세운 자신의 로직(logic)에 대한 회의나 성찰은 아예 발아(發芽)조차 하지 않는다.


[빈섬의 알바시네] 29.삼십분만이라도 천국에 있기를 시드니 루멧 감독


이 외눈바기의 사회에, 루멧의 영화는 말없는 질타이며 소리없는 죽비이다.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헨리 폰다는 신인감독의 이 작품이 꼭 아카데미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시드니 루멧은 ‘영화 만들기’라는 책에서 “영화의 좋은 스타일이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형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는 영화, 문제의식이 녹아있는 이야기를 영화를 보면서 느끼게 해주는 것. 감독의 그런 생각을 훌륭하게 드러내준 작품이 ‘12명의 노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루멧은 2011년 4월9일 림프종으로 타계했다. 한번도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지 못했지만(후보로 지명된 작품은 네 편), 영화 마니아들은 그를 진정한 거장으로 기렸다.


[빈섬의 알바시네] 29.삼십분만이라도 천국에 있기를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포스터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라는 긴 제목의 영화는 ‘그 토요일, 7시58분’이란 타이틀로 소개되기도 했다. 강도사건이 일어난 시각이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익살스럽게 기원하는 멘트이다. 원래는 “당신이 천국에서 30분간 머물기를,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라는 말의 뒷부분이다. 반어법의 조크이다. 그냥 말하면, ‘이 지옥에 떨어질 녀석아’ 쯤 되겠지만, 그러지 않고, ‘저승사자가 네가 죽은 걸 좀 늦게 발견해서 그 사이에 착오로라도 한 삼십분쯤 천당에 가 있으려무나’하고 뒤집어 기도해주는 것이다. 천하의 악당에게 베푸는 최고의 자선(慈善)인 셈이다. 이 제목 속에 영화 스토리의 뒤틀리는 내면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그리스 비극의 정수를 보여준 아이스킬로스는 ‘오레스테이아’라는 작품을 썼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를 죽인다. 아테네는 배심원 재판을 통해 ‘피에는 피’라는 전통적인 정의를 버리고,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정의로 오레스테스를 무죄로 방면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이 유럽의 오래된 스토리를 현대적으로 변주하여 묵직한 질문으로 빚어낸다. 서른 세 살이었던 루멧은 5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여든 세 살이 되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진실과 그의 정의와 그의 영화는, 삶의 한 바퀴를 돌아 오전 7시58분의 비명과 총성으로 들이닥친 셈이다.


[빈섬의 알바시네] 29.삼십분만이라도 천국에 있기를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포스터


보석상을 하는 노부부. 부유하지만 자식에게는 비교적 냉담했던 아버지의 두 아들에게 삶은 고단하고 외롭다. 맏아들 앤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는 부동산 관련 일을 하고 있지만, 아내와 함께 남미로 떠나고 싶어한다. 둘째인 행크(에단 호크)는 더 사정이 안좋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딸에게 수학여행 경비를 마련해주기도 힘겹다. 삶이 고단하고 외롭다는 점이, 그러나 그 사건의 이유이긴 어렵다. 그저 그것은 하나의 핑계이며 뒤늦은 변명의 누더기일 뿐이다. 부모의 가게를 털기 위해 형제가 범행을 꾸미고, 그 과정에서 결국 어머니가 죽음을 맞는 상황이, 자식들의 궁한 처지로 설명이 되겠는가. 돈이 필요한 자식들과 부모라도 털고싶은 맹목적 배금(拜金), 그 밑바닥엔 뿔뿔이 각개약진을 하며 살아온 가족들의 누적된 소통부재가 있다.


물론 앤디나 행크가 어머니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부모가 그들을 위해 내놓지 않은 돈을, ‘100% 안전한 범죄’로 챙기고 싶었다. 앤디가 연출하고 행크가 주연을 맡기로 한 그 범죄 시나리오는 이랬다. ‘아침 보석상 문을 열 때 침입해 위협하면 일찍 출근한 늙은 여종업원이 놀라서 돈과 보석을 내줄 것이다. 부모님의 보석가게는 보험에 다 들어두었기 때문에 피해액을 모두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러니 아무도 손해볼 사람이 없다. 그리고 다칠 사람도 없다.’ 이 계획에 약간의 차질이 생긴다. 종업원이 출근하는 대신, 어머니가 나왔고, 행크가 직접하는 대신 그런 일을 대신해줄만한 ‘꾼’ 바비가 맡았다. 어머니는 저항해서 총을 쏘았고, 그 꾼 또한 총을 쏴, 일이 커졌다.


[빈섬의 알바시네] 29.삼십분만이라도 천국에 있기를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속 한 장면


아버지 찰스(앨버트 피니)는 아내를 잃고 더 없는 비탄에 잠긴다. 경찰이 사건 수사에 적극적으로 움직여주지 않자, 스스로 범인을 찾겠다고 나선다. 두 아들은 완전범죄를 했을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렌트한 차에서 지문을 열심히 닦았으나 범죄의 진짜 지문은 ‘인간 관계’ 속에 남는다. 보석상에 침입했다가 총맞아 죽은 바비의 아내가, 주먹 좀 쓰는 오빠를 동원해 1만 달러를 내라고 행크를 협박한다. 남편이 죽었으니 먹고살 돈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장물 거래를 하는 쪽에서 아버지 찰스는 맏아들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귀띔을 듣는다. 이후 찰스는 앤디를 미행한다.


간단해 보였던 음모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터져나가는 동안, 앤디는 아내를 잃었다. 집을 나가는 그녀는 자신이 동생 행크와 놀아났다는 사실을 고백해 충격을 더하게 한다. 행크는 완전히 절망 상황에 빠진다. 둘은 바비 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나선다. 앤디는 살인을 서슴지 않고, 결국 동생에게까지 총을 겨누는 상황이 된다. 여기엔 아내와의 불륜에 대한 적개심이 끼어들어 있었지만, 뒤에서 바비의 부인이 총을 쏘는 바람에 동생 살해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총을 맞은 뒤 병원으로 실려간 앤디에게 찾아온 아버지 찰스가 대미를 장식한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찰스는 맏아들에게 자신이 자식들에게 소홀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그때 앤디는 “내가 친자식인 건 맞나요?”라고 반문했고, 찰스는 아들의 따귀를 때린다. 아들이 오열했을 때 아버지 또한 죄책감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란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다시 냉정한 아버지로 돌아왔다. 아들의 호흡기를 떼고 이불을 덮어씌워 살해하는 장면은, 앞부분의 어머니 살해와 수미상관하며 관객의 불편함을 키운다.


[빈섬의 알바시네] 29.삼십분만이라도 천국에 있기를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포스터


영화에서 인간들을 움직이는 내재율은 ‘돈’이지만, 돈에 대한 탐욕을 비판하는 쪽으로 스토리를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사회 혹은 현대사회에서 가족 내부 구성원들의 거대한 크레바스(빙하 얼음의 갈라진 틈)와 그 사이로 틈입한 살육의 릴레이를 냉담한 시선으로 추적하는 쪽에 가깝다. 아테네 신화 속의 부모살해와 자식살해, 그리고 형제살해는 시드니 루멧의 프리즘을 통해, 현대의 음울한 신화로 변주되고 되새김된다. 가족들은 결국 모두가 악당이 되고 살인자가 되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죽였고 어머니는 강도를 죽였고, 형은 동생을 죽이려 했고, 다시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였다. 악마가 와서 응징할 것은, 어느 한 사람의 패륜이 아니라, 가족 전체일지 모른다. 아일랜드 건배사는 결국 미국의 가족들의 비극적 핵분열과 관계의 살육에게 바쳐진 헌사이다. 어차피 지옥들 갈 것이니 천국에서 30분이라도 쉬어가라는 루멧의 농담은, 앤디가 마약을 먹고 아내와 사랑을 나누는 영화 첫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수단이 나빠도 목표만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맹목적 돌격이 우릴 이 지경에 빠뜨렸다. 노인 루멧은 대체 왜 이토록 사납고 불편한 풍자를 우리에게 가차없이 내던지고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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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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