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리에 케이 감독의 일본영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코엘료 원작)
나는 모르겠다. 자살자의 빈 방에 살아있는 인간들이 달아놓은 수많은, 자기 멋대로의 덧글들을. 자살자를 위한 소란이 아니라 스스로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삶들의 소음들을. 수사없이 말한다면, 자살은 삶이 늘여놓은 문제들을 단숨에 끝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게 아닌가. 어떤 자살은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책임은 살아있는 자들의 문법이다. 태어나면서 어떤 책임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듯이, 죽어가면서 책임을 들고갈 순 없다. 죽음은 문제 자체의 이탈이니까. 물론 죽음 뒤에 남게되는 어린 자식이나 사랑하는 사람, 또는 죽음이 부를 파장들을 고려하지 않은 경솔을, 살아남은 쪽의 입장에서 원망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죽음 뒤의 행방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이 반복하거나 번복할 수 없는 일회성의 유한으로 부여받은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은 그것들보다 더 심각하고 치명적이지 않는가. 살아있는 자는 예외없이 모두가 죽어가는 자이며 백년 뒤에도 살아있는 일이 불가능한 자이기에 자살은 뜯어말려야할 불행이라기 보다는 삶의 태생적인 모순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질문같은 것이다. 까뮈의 말처럼 삶은 오직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일이다. 과연,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인생이? 하지만 많은 삶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살자조차도 자살이 그저 하나의 우연하고 즉흥적인 선택인지 진지한 결론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요즘 그는 가끔 버릇처럼 중얼거린다. 고통없이 눈감을 수 있다면 다행이 아닌가. 죽음 주위에 깔려있는 음산한 기분들과 끔찍한 공기들, 그리고 죽음의 입구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과 공포를 생략할 수 있다면, 죽음이 왜 삶보다 못한 것인가. 죽음을 10년 뒤, 혹은 30년 뒤로 지연시키는 일이 왜 행복한 일인가. 죽음 이후의 부재가 충격적이라면 그것은 죽는 시기가 문제가 아니라 죽는 것 자체의 문제이다. 살아야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획이 아니며 죽어야한다는 것 또한 인간이 짜놓은 룰이 아니다. 자살은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는 인간이, 불쑥 신이 본능에 포맷해놓은 선을 자발적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선만 넘는 것일 뿐, 죽음 이외의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살이 삶보다 좋지 않은 선택이라는 확신을 공유하려고 하는 것일까. 질병이나 재난에 의한 임종은 인간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이 결정하는 종결방식에 간섭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자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그 능력은 생명과 죽음을 인간에게 부여한 바로 그 존재가 함께 준 것이다.
그녀는 죽기로 결심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의 고통이나 절망을 청산하기 위한 도피는 아니었다. 미래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이었다. 오늘과 내일이 보이고 1년 뒤와 10년 뒤가 보인다는 것. 그것은 삶을 안정감있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 삶을 견딜 수 없게도 한다. 왜 빤히 보이는 그 길을 굳이 가야한단 말인가. 생의 피로와 권태가, 더 이상 숨쉬기조차 귀찮게 만들었다. 이 경우 외부에서는 자살의 이유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가 왜 자살을 한단 말인가. 그토록 문제없고 그토록 여유있고 그토록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데?
나는 베로니카식 자살에 성공한 여인을 알고 있다. 오래 전 그녀는 내게 말했다. "형은, 너무나 잘 사는 사람이예요. 영악할 만큼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죠. 그리고, 멀리까지 가지 않고 중심을 서성거리며 고통받지 않는 법을 알고 있어요." 매우 신랄한 욕이다 싶어 뭔가 설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혀가 굳어 별 대꾸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냐? 어떻게 하면 되겠냐?" 라고 물었더니 그는 말했다. "어떡하긴요? 잘 산다는데..."
그 다음 어떤 자리에서 나는 물었다. "일이 재미있냐?" 그는 대답했다. "음...일은 재미있어요. 일만 재미있어요. 사람이 재미없고 세상이 재미없어요. 무엇보다도, 오늘과 내일이 똑 같은 게 죽을 맛이예요." 비전이 없다는 것, 그녀가 죽기 이전이나 그녀가 죽은 다음이 똑 같다. 오히려 더 나빠지고 더 슬퍼졌지만, 핏츠제럴드의 소설 속처럼 잿빛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죽고난 다음날, 나는 그녀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몇몇이서 와인을 마시는 모임이었는데, 그 대신 상가로 가서 국화꽃 한 송이를 놓고는 막걸리잔에 소주를 타서 마시고는 뻗어버렸다. 그녀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던 날,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죽음의 이유를 짐작하는 뒷말들이 무성했지만, 아무도 단언할 수는 없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바람이 커튼을 날리고 있었고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이 음악이 끝나고 난 뒤 슬픈 노래가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휘갈겨쓴 메모지가 있었을 뿐이었다. 술이 취해있었고, 우울이 부른 격정이 우연히 어떤 길로 그녀를 불러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한 때 수면제를 모으던 때가 있었다. 불룩한 수면제 흰 봉투를 외투 호주머니에 넣고 우유 한통을 들고 새벽 교회로 들어가던 때가 있었다. 세상의 곤란에 대한 도피도 아니었고, 삶의 전망에 대한 회의도 아니었다. 어리석게도 사랑에 대한 복수심같은 것이었다. 혹은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기로 한 결정이었다. 냉담해진 여인의 관심을 잠깐이라도 끌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나에 대한 냉담을 사랑으로 돌려놓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어이없는 기적을 위하여 죽어보기로 했다. 뜻밖에도 많은 자살은 이같은 '과시적 자살'의 결과이다. 정말 죽고싶은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애착과 집착을 강조하는 차원의 위험한 '생쇼'같은 것이다. 그리스의 한 철학자도 자살을 옹호하는 자신의 입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떠밀린 자살을 했다.
이 과시적 자살은 두고두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사랑은 증명되지 않았고 자살자는 멀쩡하게 살아나 다른 삶으로 걸어가버렸다. 며칠 후 나는 그녀 앞에 앉았다. 먹고남은 수면제 몇 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그걸 흉기라도 되는 듯이 급히 쓸어서 자기 손에 담으며 말했다. "바보같은 사람, 정말 대책없는 사람, 그럴 수 있다면 진짜 사랑을 왜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눈에는 그렁그렁 방울이 맺혀 있었다. 진짜 사랑이,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라는 걸, 그때 그녀는 전혀 모르는 듯 했다. 죽음은 몰라도, 자살미수는 사랑을 전혀 입증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살을 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살자를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의견들이 있으며, 이 의견들은 인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의견들은, 자살자들이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한 끝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며 즉흥적이고도 불안한 히스테리의 결과로 자살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한다. 자살자의 의도와 의지는 존중되지 않는다. 그 의도와 의지는 병적인 것이거나 취약한 것, 혹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문제에 대한 공정하거나 객관적인 정답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자살자는 소수이며 또 자살한 사람은 항의를 하거나 의견을 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소수의 침묵자에 대한 다수의 '친절의 폭력'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살자는 그의 의지대로 되도록 놔두는 것이 옳다"는 주장은, 매우 불온하고 위험해보인다. 자살자들을 위험하게 하는 논리가 아니라, 삶의 논리를 위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자살자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자살의 유혹과 공포'를 깊이 심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살고싶지 않았던 자살자에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 불필요해 보이는 호의는,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죽고싶다는 자유의지를 꺾을 권리가 그대들에게 있는가. 그녀는 그렇게 항의하지만 비웃음만 살 뿐이다. 죽고난 뒤에 그녀가 도착해있는 곳은 천국처럼 아름다운 정신병원이다. 난 미치지 않았어. 내가 왜 여기 있어야 돼? 그렇게 말했을 때, 병원의 간호사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내가 여기 몇년을 살았어도, 미친 사람이 자기 미쳤다고 하는 건 한번도 못 봤어." '미쳤다'는 문제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상식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기도 하고, 일부의 판단이 주관적으로 채택되기도 한다. 미셀 푸코가 광기의 문제를 다룬 건 이 지점 때문이다. '미쳤다'는 것은 '사회의 비정상성'을 격리하는 오래된 권력의 작동 기제이다. '미쳤다'고 지목된 사람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은, 단호하게 차단된다.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미쳤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그 판단은, 모든 타당한 주장을 봉쇄할 수 있는 방어선같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나긴 했지만,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까지밖에 살 수 없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는다. '심장 괴사'라는 것이 어떤 증상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아무런 통증과 병징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최후 일주일은 임종의 환자들과는 달리 너무나 말끔해서, 그녀조차도 의심할 만한 대목인데 말이다.
이 정신병원에는 악(惡)이 없다. 정신병이란 상태가 자신을 제대로 통제하거나 장악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라 그럴까. 악의나 분노는 대개 지적인 자의식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가능한 게 아닌가 한다. 그런 감정들의 초기 상태인 놀람이나 당황 따위가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문제에 갇혀있는 수인(囚人)은 타자를 공격하거나 이용할 여유가 없다. 베로니카는 여기서 마음의 상처는 있지만 착한 사람들을 여럿 만난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싶은 저 여자는, 첫 사랑의 장애가 갑작스럽게 현실을 적응하는 것을 방해했다. 잘 나가는 변호사였으나 갑작스럽게 패닉상태에 빠지는 장애를 얻어 가족을 잃고 병원에 들어온 여인도 있고, 또 아직도 배우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보인다. 이들은 베로니카에게 잘 접근하지 않는다. 일 주일 뒤에 죽을 사람이라 가까워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 또한 이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났어야할 몸이고, 곧 죽을 몸인데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그 정신병원에는 우리나라의 배우(이완) 하나도 가 있다. 정치인의 아들로 부모와 진로문제를 놓고 이견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싶었던 그는,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던 부모의 희망에 내면의 타격을 받아 여기로 오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낙원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낙원은 어떤 곳일까. 복숭아꽃이 사방에 피고 늘 봄날만 있으면 낙원이 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런 생각 자체가 진짜 낙원을 만드는 일에 대해 방해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연 환경과 사회적인 여건은 별로 상관없다. 잘 갖춰져 있으면 좋겠지만 다소 불편해도 낙원을 만드는데는 지장이 없다는 얘기이다. 낙원은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낙원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다만 그림으로 그려진 낙원은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이완은 낙원을 그렸지만 그 낙원에는 함께 있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베로니카가 나타났고, 곧 사라질 목숨으로 그 병원에 불안불안하게 붙어있는 사람이 되었다.
정신병원에는 의사와 환자라는 '계급'이 존재한다. 의사는 환자를 지배하고 환자는 의사에게 복종한다. 이런 지배구조가 가능한 까닭은 의사가 지닌 환자들에 대한 정보들과 그 정보와 의료기술을 활용한 처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병원은 '정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지배질서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환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어떤 환상 속에서 내적인 지배질서를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통제 자체가 매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이럴 경우 그런 내적인 질서를 무시한 강제적인 통제를 하거나, 아예 방임하거나 두 가지 정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병원에서는 거의 환자들을 구속하지 않는다. 이 점이, 천국을 만들어낸다. 병원장 또한 정신적인 결함이 있어보이고,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다. 위의 저 친구는 저 팔찌 장식 속에 들어있는 칼자국들을 보여준다. 몇 번이나 시도한 자살의 흔적이다. 삶의 상처와 절망을 공유하고 있는 것. 이것이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 지녀야할 조건같은 게 아닌가 싶다. 고통받는 내면을 서로 교환하는 행복과 위로받음으로써 조금씩 달라져가는 삶에 대한 희망을, 베로니카는 서서히 눈뜨게 된다.
그런데 어머니가 찾아온다. 그는 말한다. "자살을 할 이유가 없어요.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키웠고 그에게 모든 사랑을 다 줬어요." 마침 나는 작가 김형경의 '사람풍경'을 읽고 있는 중이다. 그가 말한 자기애적인 대상선택이 바로 이런 일방적인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자기애적 사랑이 불행한 진짜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공감, 배려가 없다는 점이다. 상대방에게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하고, 자기 멋대로 사랑을 쏟아붓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견이나 감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자신이 쏟아붓는 사랑에 대해 상대가 즐거워하는지 부담스러워하는지, 심지어는 경멸하고 혐오하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어머니는 전혀 딸의 고통과 불만을 짐작할 수 없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조차도 깊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딸은 어머니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베로니카는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한 이후로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의 도서관학과에 갔고 국립도서관의 사서가 되어 안정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때의 자신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무의식에 억누르고 있었다.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회의가 밀려오는 것도, 자신은 잊어버린 줄 알았던 그 옛날의 악몽에서 솟아나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그녀는 만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그녀에게 그녀의 아픈 기억을 만나게 해주었다. 김형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치는 방식으로 일관했던 엄마의 교육법에 대해 어린 내가 품었던 감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엄마도 당신의 입장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교육을 한 것이었을 뿐 어린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에 억압된 분노는 서너 살 짜리의 감정이며, 동시에 그 아이의 착각이 만든 감정이었을 뿐이었다." 베로니카도 그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베로니카는 환자들과 섹스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정말 만족스러운 섹스가 있었느냐고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 질문을 여기서 해보자. 당신은 정말 만족스러운 섹스가 있었는가.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일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때 망설이다가 베로니카는 답한다. 그런 적은 없었어. 다만 상대가 불편하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그리고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만족하는 시늉을 했을 뿐이야. 삶의 문제들은, 자신이 스스로 즐기지도 못한 채 형식적으로 처리하는 관계들 속에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것은, 어린 시절의 꿈이 이뤄지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문제 속에 있는 게 아니던가. 베로니카의 생각과 눈빛이 달라져가면서 그 병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 또한 정서적 안정감을 찾고 발작적 행동이 줄어들게 된다. '베로니카 효과'는 소통을 통해 얻는 삶의 안정감과 자신감이다.
처음엔 환자를 가둬두는 감옥같다고 생각했던 곳. 마감시간 일주일도 못 기다려 수면제를 사와서 더 일찍 목숨을 끊겠다고 생각했던 그곳. 베로니카는 그곳이 차츰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살아있다는 것이 달콤해진다. 누군가와 완전한 사랑을 한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꿈이 돋아오른다.
의사를 찾아간다. 그는 베로니카가 "내일도 모레도 한치 달라질 것 없는 뻔한 비전 때문에 자살하려 했다"는 베로니카의 말을 듣더니 돌 하나를 꺼내온다. "돌도 성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니?" 백년이 될지 천년이 될지 모르지만, 돌에 돋아나는 돌기들이 바로 계속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야. 느린 성장이라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야. 우리도 조금씩 바뀌어 간다. 하루하루,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진보하고 성숙한다. 같은 삶의 포즈 속에서도 깊이가 생겨난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말한다. "왜 이런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을까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내가 살 수 있는 기간은 얼마나 남았죠?"
의사는 말해준다. 길면 24시간, 짧으면 12시간 정도 남았을 거라고. 그러자 베로니카는 떨면서 말한다. "그럼, 내일 해가 뜨는 것을 다시 볼 수 없다는 뜻인가요?" 예상은 했지만 의사의 단언을 듣고보니 갑자기 두려워진다. 베로니카가 이렇게 태도가 바뀐 것이, 과연 주위의 사람들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죽음이 일주일 집행 유예된 뒤 '시간'이라는 교사가 그녀에게 삶의 향기를 느끼게 해준 것이 아닐까. 살아있다는 것이, 어떤 다른 것을 뛰어넘는 축복이라는 사실을, 째각거리며 지나가는 시계침이 가르쳐준 것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한다. 내일 해를 보지 못하는 짧은 삶.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내가 가서 죽고싶은 데 가서 죽자.
그녀는 피아노 앞에서 자위행위를 한다. 멀리서 이완이 가만히 보고 있다. 이 장면은 좀 어색해보였으나, 아마도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떨쳐내고 타인을 의식해서 흉내만 내던 육체가 아닌, 스스로 즐기는 육체를 시위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완이 그린 지상낙원 앞에 서있다. 거기엔 길고 붉은 머리의 어머니같은 여인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이완에게 필요한 것과, 베로니카에게 필요한 것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죽게되어 있는 날밤, 이완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죽으러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몸과 마음을 여는 관계를 가지며 깊은 만족을 느낀다. 아마도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구나. 이제 죽어도 괜찮다. 다만 이 행복한 생이 조금만 더 허용된다면... 파올로 코엘료는 모든 자살자들을 힘있게 설득하는 이 지상의 '삶의 구루'이다. 그대가 자살을 생각한 것은 삶의 전부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일부를 과장스럽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자살하고 싶은 마음은 삶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의 의지라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가끔 절망적으로 보이고 똑같은 삶의 권태로운 되풀이처럼 보이더라도, 자라나는 돌처럼 거기엔 정밀한 진전이 있고 내밀한 성숙이 있다고 말한다. 베로니카는, 삶을 보는 시각의 각도가 아주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이제 죽기가 싫어졌다.
코엘료는 인간을 버리지 않는다. 베로니카를 버리지 않는다. 정신병동의 의사는 다만 베로니카의 생의(生意)를 돋우는 치유적인 고려에서 '일주일 시한부'라는 뻥을 친 것 뿐이다. 이튿날 햇살이 돋고 죽음을 각오한 베로니카가 멀쩡한 채로 물 위로 다시 떠올랐을 때 그녀의 얼굴에 퍼지던 행복감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과, 이 영화는, 자살자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살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삶은 행복하고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서로 돌려보며 자신들의 선택이 옳음을 확인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소설이다. 자살자들의 소설은, 앞부분 몇 페이지에서 모두 끝났기에, 뒤에는 비어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돌아온 베로니카의 얘기일 뿐이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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