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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발을 내려다 보라(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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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발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에 익숙해져 있지만, 가만 보면 '말없는 발도 천리 간다'. 발은 방향이 말이며 속도가 말이며 거리가 곧 말이다. 이 방향이 틀리면 발머리부터 돌리고, 이 속도가 느리면 뒤꿈치가 일어나고, 이 거리가 힘겨우면 발목이 통증을 선사한다. 발은 인간이 직립하면서 어처구니 없이 모든 무게를 감당하게 된, 가장 억울한 몸의 아랫것이다.


발목이 부러졌던 어떤 날에, 발목이 멀쩡한 사람들이 걷고 뛰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기적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중을 감당하는 그 힘도 그렇지만 몇 개의 관절이 모여 그토록 유연한 동작들을 생산해낸다는 것이 그야 말로 예술의 경지라는 걸 알게 됐다. 킬힐 위에 그 불편한 상태로 신체를 이동시키는, 여인의 작은 발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발은 낙천주의자이다. 아무리 많이 걸었어도 내일이면 다시 거뜬히 일어나 걸을 준비를 한다. 걸으면 걸을 수록 씩씩해져, 더욱 힘든 길을 앞장 서서 내달린다. 나 대신 손을 시키라든가, 혹은 똑똑하다는 머리 네가 내려와서 나처럼 걸어보라든가 따위의 불평을 내놓지 않는다. 누군가 고생한다고 주물러 주면 그저 몸둘 바를 모른다. 게다가 발은 가장 먼저 신명을 느낀다. 노래가 흘러나오면 스스로 건들거리고 겅중거리고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 슬픔도 춤으로 만들 줄 알고 괴로움도 댄스로 번역할 줄 안다.


비 오고 눈 오고 꽃 피고 단풍 드는 날에도, 발이 말없이 나선다. 구경은 모두 눈코입귀가 하는 것이건만, 그래도 위에서 좋아하시니 나도 좋은 거 아니냐고 신나서 뜀박질이다. 허허, 내 몸의 모든 것들아. 쟤만 닮아라.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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