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잊어버린 사람이여.
나를 잊어버린 사람이여. 마치 낡은 엽서같은 나를,
이제야 네게 보낸다. 사랑이란 어쩌면 모든 감정들의 이면지같은 것이라고,
지금의 너를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시간에도 이면지가 필요할 것이기에,
그냥 기억에 첨부하는 기분으로 너에게 나를 보낸다.
질투, 그것은 사랑이 좁아지는 모양새였다. 사랑이 간절해질 수록 희망은 옅어지고, 그 옅은 희망을 너는 전투적인 그리움으로 채웠다. 이제 그 질투의 이면지인, 사랑을 동봉하여, 너에게 나를 보낸다.
경멸, 그것은 사랑이 나타났던 그 환상적인 방식의 역순이었다. 사랑을 우러렀던 첫 마음이, 그 감정을 바닥으로 패대기친 뒤 침을 뱉으며 그것을 내려다 보던 그 마음이었다. 이제 경멸의 이면지인, 사랑을 동봉하여, 너에게 나를 보낸다.
환멸, 사랑은 환(幻)이었다. 환이 사라지는 날에는 현기증이 왔다. 환멸은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이룬 세상의 모든 풍경을 깨버리고 싶은 충동이었다. 사랑했던 것들이 거울 속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러나 사랑했던 너 역시 그 거울 속에 함께 있었음을. 다만 네가 그 거울 밖에 문득 튀어나와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시간의 전체를 부정하고 있음이었다. 이제 환멸의 이면지인, 사랑을 동봉하여, 너에게 나를 보낸다.
증오, 사랑은 어쩌면 미움이 증발해버린 마음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내압이 약해지자 미움이 마구 밀고 들어왔다. 사랑이 증오를 부른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음과 사랑하고 싶음이 채워지지 않는 그 분노가 증오로 자라났다. 그러니 증오의 이면지인, 사랑을 동봉하여, 너에게 나를 보낸다.
분노, 증오는 외눈이지만 분노는 그 실행의 칼날이었다. 분노는 물론 집착과 후회의 사이에 낀 광기이지만 그것 또한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천사는 분노하여 악마가 되었고, 좋은 쪽만 보이던 처음은, 마침내 그 좋은 모든 것이 분노의 이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분노의 이면지인, 사랑을 동봉하여, 너에게 나를 보낸다.
슬픔, 사랑은 처음부터 슬픔이었다. 사랑은 늘 조금씩 아팠고 조금씩 모자랐고 조금씩 잘못 되었다. 그러나 그 아픔과 모자람과 잘못이 사랑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을 덜 채운 빈자리를 슬퍼하는 마음이, 사랑을 더 채우는 힘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더 고갈시키는 마음이 되었다. 슬픔이 커지고 사랑이 줄어들면서, 마침내 모든 사랑은 슬픔이 되었다. 그러니 사랑이여. 슬픔의 이면지인, 사랑을 동봉하여, 너에게 나를 보낸다.
죽음, 사랑은 삶에 관한 가장 진지하고 극적인 예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삶을 덮는 무엇이었다.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모든 몸들은 죽고, 그와 함께 사랑들이 죽어갔지만, 많은 사랑은 죽음보다 먼저 죽었다.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이제 죽었지만, 그 죽음은 그 전의 격렬했던 삶을 추억하는 이유이다. 당신이여. 무척 그립다. 당신 속에서 죽어간 내 기억들을 동봉하여, 너에게 나를 보낸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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