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유수경 기자]말없고 시크한 배우 차태현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 그의 스크린 복귀작 '슬로우 비디오'는 동체시력과 CCTV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흥미를 자극한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내 눈에만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보인다면? 상상만으로도 굉장한 일들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주인공 여장부(차태현 분)는 초등학생 시절, 갑작스레 모든 사물이 느리게 보이는 현상을 경험한 뒤 병원을 찾아 '동체시력'이라는 판정을 받는다. 남들이 못 보는 찰나의 순간을 보기 때문에 빠르게 날아오는 물체도 집중만 하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장부는 남들과 다른 눈을 가졌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게 된다.
이후 20년 동안 엄마가 운영하는 미용실 쪽방에서 TV드라마만 보며 살았고, 모든 인생의 경험을 TV를 통해 간접적으로 쌓아나간다. 그러다 갑작스레 세상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한 그는 대한민국 CCTV 관제센터에 취직,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면서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로 인해 오랜 시간 놓치고 살아야 했던 우정과 사랑 등 많은 감정들을 배운다.
극중 '영화배우 허세 말투'를 지닌 남다른 시력의 소유자 여장부 역은 배우 차태현이 맡았다. 차태현은 '헬로우 고스트'(2010) 이후 4년 만에 김영탁 감독과 다시 만나 또 한 번의 흥행을 노리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코믹한 모습을 덜어내고 진지하고 시크한 모습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차태현의 필모 사상 가장 차태현 스럽지 않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예고처럼 이번 작품에서는 그가 나서서 폭소를 유발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절제되면서도 섬세한 연기로 캐릭터의 특별한 매력을 드러내며 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냈다.
상대역으로 등장한 남상미는 부스스한 폭탄 머리에 화장기가 없는 얼굴로 등장해 사랑스러운 매력을 발산한다. 해맑고 발랄하면서도 당차고 강단 있는 모습의 그는 소심한 장부와 대비되며 로맨스의 끈을 팽팽하게 당긴다. '슬로우 비디오'에서 웃음과 감동을 함께 책임진 오달수는 언제나처럼 실망 없는 연기로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CCTV 관제센터 공익요원으로 박사출신의 고스펙을 자랑하는 병수를 연기한 그는 남다른 장부를 이해하고 도와준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인간미는 오달수가 아니면 상상 하기 힘들 만큼 적절한 캐스팅이었다.
장부의 안과주치의 고창석은 감초연기를 톡톡히 해내며 관객들의 배꼽을 쥐게 한 다. '외로운 형'에서 장부의 '최측근'으로 발전하는 김강현 역시 존재감을 발산하며 영화에 힘을 실었다. 순진하면서도 푼수기를 지닌 노처녀로 등장한 진경 또한 색깔 있는 연기로 극에 양념을 쳤다.
무엇보다 '슬로우 비디오'는 가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 개봉 시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종로의 옛느낌 물씬 나는 골목길은 스크린에 뛰어들어 걷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미를 자랑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그려지는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지금껏 많은 영화에서 보여진 것과 다른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CCTV 속 사람들은 모두가 주인공이며, 엑스트라가 없다.
김영탁 감독은 인간애를 바탕으로 따뜻한 감동을 전달한다. 그러나 2시간 동안 신나게 웃고 싶은 관객이라면 다소 실망감을 안고 돌아갈지도 모른다. 차태현은 주특기인 '코믹' 대신 '감동'을 택했고, 영화는 요 근래 보기 드문 담백하고 잔잔한 느낌이 강하다. 정신없이 빠르게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의미있는 작품. 주변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둘러보게 한다. 개봉은 오는 10월 2일.
유수경 기자 uu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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