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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靑年' 된 참여연대…이태호 사무처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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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회색이고 행동은 초록'…시민과 함께하고파 참여연대 뛰어들었죠

한국 시민운동사 20년 苦樂 함께한 이태호 사무처장
부패정치인 낙선·재벌개혁 운동 등 사회변화 자부심

스무살 '靑年' 된 참여연대…이태호 사무처장 인터뷰 ▲11일 오후에 만난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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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유제훈 기자] "서른, 잔치는 끝났다."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인 1994년,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에서 이같이 말했다. 1980년대 뜨거웠던 민주화의 열망은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시대의 흐름, 직선제라는 현실에 부딪혀 사라졌다. 그러나 최 시인이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것"이라고 '예언'했듯 그 빈자리를 채우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올해 스무살 청년이 된 '참여연대'의 창립이 있었다.


참여연대는 1994년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첫 발걸음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활동가가 10여명에 불과한 작은 조직이었지만, 지난 20연간 참여연대는 한국사회 시민운동사를 새로 썼다. 반부패 사회운동, 부패정치인 낙선ㆍ낙천운동부터 광우병 촛불시위, 세월호 참사 유가족 농성까지 90년대 이후 굵직 굵직한 사회적 이슈의 정점에는 언제나 참여연대가 자리해 왔다.

지난 11일 통인동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이태호 사무처장(사진)은 참여연대의 20년을 지켜보고 함께 해 온 산 증인이다. 서울대 86학번인 그는 비슷한 또래 친구들과 달리 서른을 바라보는 94~95년까지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꿈을 갖고 있던 여러 친구들이 다양한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퍼져나가던 1995년 5월, 이 처장 역시 참여연대 공채(?) 1기로 시민운동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다.


이 처장이 참여연대에 몸 담게 된 이유는 비교적 간명했다. "91~92년께 제가 사회과학을 공부하던 당시 유행하던 말 중에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나무의 생명이다'(괴테)라는 말이 있었어요. 이때 '사회과학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죠. 80년대가 이념적 운동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특정한 이념과 노선을 가지기보다 행동하는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실험을 해 보고 싶다, 저기(참여연대) 가서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처장이 처음 참여연대 활동가로 세상에 발걸음을 내딛은 1995년 5월,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시민사회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90년대 초는 민변, 여성단체연합, 전노협, 전교조와 같은 전문가 운동ㆍ조합 운동 단체들이 이제 막 생겨나던 시기였어요. 활동을 시작했을 때 창립 8개월차였던 참여연대 역시 활동가 열두 명에 회원 200여명 남짓이 전부였고, 쥐가 나다니는 열악한 사무실을 쓰는 열악한 환경이었죠."


그렇게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참여연대는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반부패 운동, 재벌개혁 운동을 거쳐 2000년 부패정치인 낙천ㆍ낙선 운동을 거치며 그야말로 참여연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처장은 "기존에 대중적 이슈가 아니었던 재벌개혁ㆍ복지 문제가 외환위기를 거치며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안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이 과정에서 참여연대의 영향력이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해서 확대되었다"고 말했다.


1994년 9월10일 출범 당시 200여명 남짓한 회원에 12명의 활동가로 시작한 참여연대는 현재 1만3000여명의 회원, 50명이 넘는 상근활동가와 200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를 갖춘 명실상부한 시민사회계의 '대표 조직'이 됐다. 쥐가 들끓던 사무실도 2007년 종로구 통인동 사옥 건립으로 산뜻하고 화사하게 변신했다.


가정을 이루게 된 것도 참여연대에서 맺은 인연 덕분이었다. 그의 부인 역시 활동가였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두 사람은 원래 면식은 있지만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는데 2000년 부패정치인 낙선ㆍ낙천운동 백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호감을 키워 결혼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한다.


이 처장은 2011년부터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회운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잠시 기억을 되짚던 그는 '재벌 개혁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이 처장은 "지금까지 국가기관에 대한 감시ㆍ비판은 많았지만, 재벌체제에 대해 문제제기를 시작한 것은 참여연대가 처음이었다"고 털어놨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보수 진영에서는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소액주주 운동에 대해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제기했고, 진보 진영에서는 '결국엔 주주자본주의일 뿐'이라며 평가절하했다. 이 처장은 "당시 소액주주운동이나 1인 시위는 다가가기 힘든 거대권력에 맞서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며 "재벌의 지배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을 살리기, 경제민주화 등으로 의제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여연대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때는 소위 '민주정부'(김대중ㆍ노무현 정부) 시기였다. 이 처장은 "사실 민주정부 10년 이라는 시기에 참여연대는 참 괴로웠다"며 "민주적 지향ㆍ민주적 절차 개선 등 민주정부와 참여연대 간에는 공통점도 많았지만, 재벌개혁ㆍFTAㆍ이라크 파병 등을 두고 부딪치는 부분도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시민운동에 청춘을 바친 이 처장은 이제 어느덧 중년 활동가가 됐다. 미래 계획은 무엇일까. 이 처장의 답은 '활동가로 남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 시민운동을 하는 저를 포함한 각 단체의 집행책임자들은 일선 간사로부터 성장한 사람들인 만큼, 앞으로는 시민운동 출신의 리더십이 정치권의 리더십으로 이전하는 사례는 많지 않을 것 같다"며 "나 역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친 후 과거에 해 왔던 역할을 맡아 활동가로서 열심히 살고 싶다"고 말했다.


"기왕이면 여기(참여연대)에서 정년(?)을 맞고 싶습니다."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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