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농구, 야구 등 인기 구기 종목에서 한국과 맞붙는 나라가 정해지면서 제17회 인천 아시아경기대회(9월 19일~10월 4일)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1970년 제6회 방콕 대회 이후 이루지 못한 농구와 축구의 동반 우승(남자)을 위해 농구는 본선 라운드에서 먼저 신흥 강호 요르단(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4위·2011년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 2위)을 잡아야 한다. 축구는 1970~80년대 주요 국제 대회에서 종종 발목을 잡혔던 말레이시아와 조별 리그 1차전을 사전 경기(9월 14일)로 치른다. 한국 선수단의 첫 승전보가 기대된다.
4위 싸움이 한창인 프로야구는 9월 15일부터 30일까지 일시 ‘휴전’에 들어간다. 두산과 LG, 롯데, KIA, SK 등에는 더없이 소중한 전력 정비 기간이다. 이 기간 류중일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9월 22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태국과 아시안게임 야구 B조 조별리그 첫 경기를 한다.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 같은 경기이기에 유일한 아마추어 홍성무(부산 동의대)가 마운드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이틀 뒤인 24일 같은 곳에서 대만과 두 번째 경기를 한다. 사실상의 조 1위 결정 경기다.
일정이 나오면서 대회 2연속, 통산 네 번째 우승을 겨냥하는 야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많은 야구팬이 1994년 히로시마 대회부터 야구가 아시안게임 종목으로 열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1915년에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열렸다는 얘기를 꺼내면 거의 모든 야구팬이 무슨 뚱딴지와 같은 소리냐고 할 것이다. 먼저 야구가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열리기 시작한 때부터 살펴보자.
한국이 출전하지 않은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51년 뉴델리에서 열렸다. 그때부터 야구는 오랜 기간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이 아니었다. 야구가 처음 열린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에 5-6으로 져 은메달을 차지했다. 문동환, 임선동, 박재홍(이상 연세대), 조성민, 손민한, 진갑용, 홍원기, 김종국, 조경환(이상 고려대), 전병호(영남대), 위재영(인하대), 최기문(원광대), 이병규, 김재걸(단국대), 강혁(한양대) 등이 당시 멤버다. 대부분 은퇴했고 세상을 등진 이도 있다. 현역은 손민한(NC), 이병규(LG) 정도. 대학 이름들에서 선수들의 풋풋했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첫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한국은 1998년 방콕 대회 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박찬호와 뉴욕 메츠의 서재응을 불러들이고 프로와 아마추어를 섞어 ‘드림팀’을 꾸렸다. 선수들은 결승에서 일본을 13-1 7회 콜드게임으로 누르고 금메달의 꿈을 이뤘다. 박찬호 등 출전 선수 전원이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 한국은 이후 2002년 부산 대회와 2010년 광저우 대회에서 우승했고, 2006년 도하 대회에서 3위를 했다.
1910년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오늘날 아시안게임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제1회 극동선수권경기대회(Far Eastern Games)가 1913년 마닐라에서 열렸다. 극동(極東·Far East)은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 말로 유럽 쪽 시각에서 본 표현이다. 아무튼 제1회 대회에서는 축구 한 종목만 열려 미국인과 영국인, 스페인인 등으로 구성된 미국령 필리핀이 중국(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을 2-1로 누르고 우승했다. 제2회 대회는 1915년 상하이에서 열렸는데 중국과 일본, 필리핀이 출전해 육상, 수영, 사이클, 축구, 농구, 배구, 테니스 그리고 야구에서 기량을 겨뤘다. 야구가 종목에 들어 있는데 아쉽게도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 3회 대회는 1917년 도쿄에서 열렸다. 이 대회와 관련해서는 우리나라 체육 관계자의 기록이 있다.
1920년 조선체육회 창립 멤버인 백낙준 선생(뒷날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은 체육회 창립 관련 회고에서 1917년 5월 도쿄에서 열린 제3회 극동선수권경기대회를 참관하고 온 방두환 선생의 글을 인용했다. 방두환 선생의 글에는 “너희들은 왜 아니 왔느냐? 적수가 없어서 아니 왔느냐? 일이 바빠서 못 왔느냐? 아, 슬프다. 우리도 권리가 있고 능력이 있다. 우리도 할 것이다. 굳세고 힘 있게 할 것이다. 방 안에 망을 치고라도 야구와 정구를 연습하리라. 개천 물에라도 들어가 수영을 숙달하리라”라는 내용이 있다. 필립 질레트가 이 땅에 야구를 전파한 지 10여년 뒤의 일이다.
한국인이 처음으로 국제종합경기대회를 보고 쓴 글을 보면 제2회 대회에 이어 제 3회 대회에서도 야구를 한 것이 분명하다. 1919년 제4회 대회는 마닐라에서 중국, 일본, 필리핀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는데 어떤 종목이 진행됐는지는 기록이 없다. 1921년 제5회 대회는 상하이에서 열렸다. 역시 경기 종목이 알려져 있지 않은 가운데 중국과 일본, 필리핀 등 기존 출전국에 영국령 말레이시아, 영국령 인도, 태국, 네덜란드령 자바 등이 참가했다.
1923년 제6회 대회는 오사카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육상과 수영, 야구, 테니스, 축구, 농구, 배구 등의 경기가 열렸다. 일본이 육상, 수영, 테니스에서 우승했고 필리핀이 야구, 농구, 배구에서, 중국은 축구에서 우승했다. 1925년 제7회 대회(마닐라), 1927년 제8회 대회(상하이)도 출전국 외에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1930년 5월 24일부터 31일까지 도쿄에서 열린 제10회 대회에는 일본, 중국, 영국령 인도, 필리핀이 출전해 육상, 수영, 농구, 배구, 축구, 야구, 테니스, 필드하키, 복싱, 체조 등 10개 종목에서 경쟁했다. 경기 종목을 볼 때 제법 국제종합경기대회의 틀을 갖췄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배구와 축구, 농구, 야구 등이 열리지 않았고 극동선수권경기대회 종목에 승마와 펜싱, 사격 레슬링, 역도 등이 더해져 14개 종목이 개최됐다. 제10회 대회 야구 경기는 1926년 개장한 메이지진구구장(오늘날 일본 프로 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도쿄 6대학리그 홈구장)에서 열렸다. 야구 종목 일정을 7일로 잡은 걸 보면 더블 리그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극동선수권경기대회는 1934년 제10회 대회(마닐라)까지 열렸다. 1938년 예정됐던 제11회 대회(오사카)는 제2차 중일전쟁으로 취소됐고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회 전체를 살펴보면 구기 종목에 상당한 비중을 뒀던 것으로 보인다. 야구는 일본과 필리핀의 영향으로 꾸준히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54년 12월 열린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마닐라)에서는 필리핀이 우승, 일본이 준우승, 한국이 3위를 했다. 아시아야구연맹도 마닐라에서 결성됐다, 필리핀은 한국과 일본 이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야구는 아직도 세계화 수준에서 축구나 농구 등에 크게 뒤지지만 적어도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1910년대에 이미 국제 대회를 치를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통이 인천 아시안게임에 이르고 있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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