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이 유명한 영화를 봤다. 그리고 내가 본 느낌을 곱씹고 싶어서 몇 개의 영화평을 읽어보았다. 놀랍게도 '노인의 성'이나 '은교의 노출' 혹은 '아동 성학대' 등 피상적이고 즉흥적인 논의들이 가득하여, 내가 본 영화가 그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어리둥절해졌다. 영화를 자극적이고 야하게 만들어 팔아먹자는 흥행 집착이 어느 부분에선가 끼어들지 않았다고 내가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 영화가 지닌 '위대한 점'을 읽어내는 게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박범신 작가의 깊은 사유의 결과이겠지만, 이 영화의 스토리는 신라향가 <헌화가>에 바치는 아주 열정적인 오마주라고 생각한다.
紫布岩乎邊希 자줏빛 바위 가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吾兮不喩慙兮伊賜等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花兮折叱可獻乎理音如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신라 성덕왕(33대) 때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곁에 있는 바위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부인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 꽃을 꺾어다가 나에게 줄 사람은 없는가?" 했으나 사람들은 "거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하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 이때 노인 하나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노랫말을 지어서 부인에게 바쳤는데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저 스토리를 박범신은, 거울을 벼랑 중턱으로 떨어뜨린 17세 은교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가는 70대의 이적요시인의 모티프로 부활시켰다. 이 영화는 어린 그녀에게 바치는 노시인의 헌화가이다. 늙어가는 존재의 성적 퇴화에 대한 비감이 섞여든 것은, 리얼리티를 위한 장치 정도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 삼국유사 스토리가 묻고 있듯이 '사랑이란 무엇이냐'이다. 강릉태수 순정공은 물론이고 그 주위에서 그녀를 호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벼랑 아래 꽃을 꺾으러 가려 하지 않았다. 자기 목숨보다 저 꽃이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한 노인이 목숨을 걸고 꽃을 바쳤다. 이것을 뭐라 말할 것인가. 사랑은 젊음에게만 고유한 것인가. 순정은 나이들수록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얘기가 아닌가.
영화 <은교>의 이야기 장치들은 헌화가 노인이 목숨을 걸고싶을 만큼 사랑을 느끼는 그 대상에 대한 절절한 기록이다. 그 헌화가 노인은 다름 아닌, 늙어가는 모든 혹은 많은 남자들의 내면이기도 하다. 젊음이 상을 받은 게 아니듯 늙음 또한 벌을 받은 게 아니라는 것.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잠깐 갈아입는 무상한 육신의 옷. 그러나 사랑은 그것 저 아래에 숨어앉아 세월이 갈 수록 더욱 깊고 애절하고 뜻밖의 희열로 닥쳐드는 것이 아니던가. 누가 말했듯이 적요한 인생에 더욱 피사체가 또렷하게 보인다. 젊을 때는 놓치고 지나간 것들이, 그 아름다운 빛과 냄새와 소리와 그림자와 뉘앙스들이, 그제서야 보인다는 주장을, 영화는 헌화가를 빌어 드러낸다.
나같으면 박범신처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서지우를 이적요의 제자답게(시인이 소설가 제자를 둔 것과, 그 제자에게 소설을 써주는 상황도 좀 이상하다) 시인으로 등장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발표한 작품도 '은교'라는 시였을 것이다. 작가 박범신 또한 그러고 싶었겠지만, 그가 가슴 속에 품은 헌화가의 떨림을 담은 '은교'라는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곳곳에 이적요의 시와 서지우의 시가 교차되어 흘러나오고, 결정적인 순간에 헌화가의 변주로 현대적 감수성을 붙드는 '은교'라는 시가 흘러나왔다면, 이 스토리는 완벽하게 수로부인의 재탄생이 되었을 텐데...휴우, 욕심이 과한가. 여하튼 스토리텔링이 뭔지를 말해주는, 흥분되는 영화였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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