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30일부터 전시
국내 작가 30명, 고운을 기리는 작품 50여점
신라 최고의 천재 시인
경주 등 그의 자취 담긴 장소 재해석
세월호 유가족 달래주는 그림도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불운했던 천재, 당·송 100대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힌 최고의 문장가, 유·불·선 삼교를 통합해 '풍류(風流)' 사상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 1200여년 전 통일신라 말 인물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909년 이후)을 재해석한 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해 6년 만에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이었던 빈공과에 최고 성적으로 급제했다. '토황소격문'으로 중국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고 황제에게 특별하사품인 금띠를 받았으나 이방인인 그가 당나라에서 올라갈 수 있는 지위는 한계가 있었다. 28세에 귀국길에 오른 그는 6두품 출신으로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에 올랐지만 신라에서도 신분제의 한계로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라는 사회개혁안을 올렸으나 이도 무위에 그치자 좌절한 그는 속세를 떠난다. 신발만 남긴 채 가야산의 신선(神仙)이 되고 말았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마지막에 대해선 누구도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예가·화가·사진작가 30여명이 최치원에 대한 오마주(hommage, 존경·경의)가 담긴 50여점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최치원의 문장과 글씨가 새겨진 탁본·문필집·현판 등 40여점도 한데 모아졌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내 서예박물관에서 30일부터 9월 14일까지 열리는 '최치원-풍류 탄생'전에서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은 "최치원의 인물상과 생애, 주유천하 현장과 설화 그리고 그의 문예와 저작 등 유물을 바탕으로 '풍류'라는 우리 정신문화의 원형질을 예술작품으로 시각화한 전시"라고 소개했다.
최치원은 삼교를 회통시키는 '풍류'를 우리 고유사상으로 제시한 인물이다. '풍류'라는 말 자체가 그가 쓴 진흥왕조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최초로 전해진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지난 24일 미리 가본 전시장에는 "고통과 외로움을 풍류로 승화한" 최치원의 삶이 예술작품들을 통해 표현돼 있었다. 박물관 2~3층을 가득 채운 작품에는 최치원이 살아 생전 머물렀던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등이 녹아 있다. 작가들은 전시를 위해 최치원의 자취가 담긴 장소들을 답사하며 느낀 감흥과 의미들을 작품에 담았다. 한국화가 박병춘의 대형 그림 '낯선, 어떤 풍경- 가야산홍류동계곡'에는 하동 쌍계사에 있는 최치원의 진영이 작품 아래 중앙에 있고 그가 유람한 산수가 붉은 바탕에 먹으로 거대하게 그려져 있다. 곳곳에 고운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며 연꽃들이 공중 위로 떠다닌다. 사진작가 배병우의 '경주 소나무'는 고운의 고향이자 실존 공간인 경주를 새롭게 떠올리게 한다. 조용철의 작품 '수서호의 봄'은 당나라 시절 최치원이 벼슬을 하고 '토황소격문'도 지었던 중국 장쑤성 양저우의 현재 모습이 담겨져 있다.
장소성이 드러난 작품 외에도 최치원의 시문을 쓴 서예작품도 여럿 눈에 띈다. 국제적인 서예가 정도준이 최치원의 서체인 고운체(孤雲體)로 써내려 간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이 시에는 비오는 가을 밤 외로운 고운의 마음이 전해진다.
이외에도 한상아의 'Take this waltz(왈츠를 타고)'란 작품은 고운과 관련한 ‘쌍녀분’ 설화가 내포돼 있다. 당나라에서 과거 급제 후 발령을 받은 율수현(현재 장쑤성의 난징시 내 한 지역)에서 최치원이 우연히 '두 여자의 무덤'을 발견한 후 원혼들을 만나 기구한 사연과 억울함을 듣고 달래주며 정을 나눴다는 이야기다. 설화에 담긴 젊은 목민관 최치원의 사랑을 미디어로 형상화했다.
황재형의 작품은 ‘목민관’으로서 최치원을 세월호 참사현장으로 호출해 유가족의 아픔을 위무(慰撫)해주고 있다. 울부짖는 유가족 앞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영정은 슬픔을 보듬는 더 큰 풍류임을 그림 언어로 일깨워 주고 있다. 서용선 작가는 최치원의 출세와 입산(入山)을 주제로 한, 장승을 닮은 대형 목조 작품 두 점을 세웠다.
최치원의 면모를 다채롭게 담은 작품들은 작가들의 역량만큼 수준급이었다. 다만 리모델링을 연내 앞두고 있는 박물관 내·외부 공간과 작품 배치가 이를 받쳐주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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