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한 얼굴의 40대 남자가 여행 가방을 한아름 메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앞마당에 주차된 자동차는 시동이 걸린 채 트렁크가 열려 있다. 남자가 트렁크에 여행 가방을 푸는 동안 팔자 눈썹의 아내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했잖아. 뭐 하러 노래방까지 가서는. 당신이 청춘이야!?" 중학생 아들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엄마를 거든다. "그래 맞아, 노래방은 좀 오버다." 전날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남자는 연신 한숨이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하는 표정으로.
선거 날, 이른 아침 투표하러 집을 나서던 길에 아파트 단지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가족 여행을 떠나는 모양인데 2대 1로 수세에 몰린 남자가 안쓰럽기도 하고, 2차 노래방까지 뛴 체력이 한없이 부럽기도 하다가 며칠 전 인터넷에서 봤던 '40대 남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라는 글이 문득 떠올랐다. 40대 남자의 금기사항인데 첫 번째가 '노래방에 가지 마라'였다. 40대는 노래방 1세대로 20년째 다녔으니 이제는 다른 데서 놀라는 훈계다. 그렇다면 어디?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공자는 나이 40을 불혹(不惑)이라고 했지만 유혹(誘惑)을 받기도 쉽다. 조직의 리더로서, 사회의 척추로서 권한과 책임을 쥐고 있어서다. 지나온 삶도 파란만장하다. 독재ㆍ군사 정권의 엄혹했던 분위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입시 지옥을 거쳤고, 머리가 굵어져 민주화 과정을 경험했으며, 사회에 진출해 산업을 살찌웠고, 아들딸 낳아 키우면서 적당히 이기적으로 타락도 했고, 회사에서는 후배보다 상사 눈치를 더 보고, 그러다 세월호 참사에 가슴 아파하기까지.
그런 40대를 5060 선배들은 철이 없다고 혀를 차고 2030 후배들은 '꼰대'라고 놀린다. 선배들의 눈에는 40대의 과거 흔적이, 후배들에게는 현재 모습이 각인된 탓이다.
2030과 5060에 '낀' 40대는 이번 6ㆍ4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었다.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려는 2030, 자신들의 과거를 평가받으려는 5060의 극한 대결에서 40대는 어느 한 쪽도 이기거나 패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일방적인 쏠림을 막고 갈등과 분열을 차단했다. 철부지와 꼰대 사이에서, 40대 투표가 갖는 가치는 바로 이것이다. 균형감. '낀' 세대가 아니라 '아우르는' 세대로서의 역할이다. 40대 투표율이 다른 세대보다 더 높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싫다면. 철 없다고 타박받지 않으려면. 그나저나 숙취의 저 남자와 팔자 눈썹의 그 아내도 투표를 하고 여행을 갔을테지?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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