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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천개의 산 너머 두고온 여인아(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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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90)

[千日野話]천개의 산 너머 두고온 여인아(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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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和鼎)은 진귀하고 사치스러운 도자기 예술을 말하는데, 왕을 보필하는 재상 자리를 그에 비유해서 쓰는 말이다. 또 매실을 쪄서 만든 조미료를 가리키기도 하니 절묘한 중의법이다. 인연도 없는 화정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일이 어찌 내게 맞겠는가. 두향이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혹애(酷愛)는 혹애(惑愛)를 살짝 바꿔 쓴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한 여인을 그리워하는 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그에겐 마뜩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청향(淸香)이 아니라 청분(淸芬)이라고 썼다. 같은 뜻이다. 이 또한 두향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는 그걸 살짝 감췄다. 내가 언제든 벼슬을 그만 두고 그대에게로 돌아오기로 한 약속을 지켰으니 내가 그 수많은 봄날에 그대를 챙기지 못했다고 원망하지는 말게나. 이 순정의 남자는 아직도 두향이 저 단양 강선대에서 매화를 바라보며 자신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1570년 그의 나이 일흔이 되던 해, 3월27일 손자 이안도(1541~1583)가 서울에 갖다 놓았던 매화 화분을 안동으로 가져왔다. 그는 두향이 돌아온 듯 몹시 기뻐하며 이렇게 읊는다.


脫却紅塵一萬重 來從物外伴?翁(탈각홍진일만중 내종물외반구옹)
不緣好事君思我 那見年年?雪容(불연호사군사아 나견년년빙설용)

일만 겹의 속세를 벗은 듯
세상의 바깥으로 쫓아와 야윈 늙은이와 함께 해주다니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이 기쁜 일이 인연이 아니라면
어찌 해마다 얼음눈같은 그 얼굴을 볼 수 있으리


세상 바깥으로 쫓아와 야윈 늙은이와 함께 있어주는 두향.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이 좋은 사건이 어찌 인연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해마다 그대 얼굴 보며 이렇듯 행복한 것을. 퇴계는 그해 마지막까지 도산서당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12월 들어 병이 깊어졌다. 3일엔 설사를 했다. 두향이 준 매화분을 바라보며 퇴계는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이리 불결하니, 저 매형(梅兄)에게 절로 미안해지는구나. 부끄러우니 다른 데로 잠깐 옮겨놓으면 안되겠느냐.”
그러면서 가만히 그의 매화시 한 편을 읊조렸다.


梅?迎春帶小寒 折來相對玉窓間(매악영춘대소한 절래상대옥창간)
故人長憶千山外 不耐天香瘦損看(고인장억천산외 불내천향수손간)
매화꽃 봄을 맞아 소한(小寒) 추위를 둘렀네
꺾여 들어와 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했네
천 개의 산 너머 옛 여인을 오래 생각하네
천진한 향기가 시들어 줄어드는 건 도저히 못 볼 일이네


천 개의 산 너머 두고 온 여인은 지금도 거기에 있을까. 혹애일매(惑愛一梅) 네 글자로 여전히 피어있을까. 그 여인의 향기가 시들어 줄어드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이렇듯 제 앞가림도 못하게 된 늙은 몸을 저 매형(梅兄)은 어찌 생각할까. 다시 닷새가 지났다. 8일날 아침, 퇴계는 곁에 앉은 제자에게 말했다. “저 매화에 물을 좀 줘라.” 그리고는 물을 머금은 분매를 한참 동안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아침엔 날이 맑았는데 오후 저녁답이 되자 흰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어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누웠던 자리를 깨끗이 정돈해다오.” 퇴계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힘이 없어 쓰러지려는 것을 제자가 부축했다. 그는 앉은 채로 숨을 거뒀다. 하늘에 구름이 흩어지더니 눈이 걷혔다.


퇴계 후손인 고(故) 이가원 선생이 충주댐 수몰 무렵에 꿈을 꿨는데 꿈속에 두향이 나타났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여기 그대로 두시오. 물에 잠겨서라도 이곳에 있고 싶소.”
“저 매화에 물 줘라”고 말한 퇴계와 “물에 잠겨서라도 이곳에 있고 싶소”라고 말한 두향. 두 사람의 사랑은 수몰(水沒)된 강선대에서 아직도 덜 깬 꿈으로 서성거린다. 단양은 저 냉가슴으로 익혀낸 비련으로 아름답다. 매화에 피고지는 신산(辛酸)한 사랑은 죽어도 끝나는 법이 없다.



천일야화- 퇴계의 사랑 두향은 총 90회로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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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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